만약 딸을 낳게 된다면...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까?

by 강병진

지난 2014년 11월, 영국의 한 7살 소녀가 대형마트 테스코를 크게 '혼낸' 사연이 화제가 되었다. 매기란 이름의 이 아이는 평소 슈퍼히어로를 좋아했는데, 엄마와 함께 마트를 갔다가 슈퍼히어로 장난감 틈에서 '소년들을 위한 장난감'(fun gifts for boys)이란 안내문을 발견한 것이다. 불쾌감을 느낀 매기는 이 안내문 옆에서 무서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고, 이를 엄마는 트위터를 통해 테스코 쪽에 전달했다. 이 사진이 1만 번 넘게 리트윗되면서 화제가 되자, 테스코는 바로 안내문을 삭제하기로 했다는 답변을 전달했다.


아이를 낳는다면 언제나 딸을 낳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딸을 낳아서 같이 야구도 보고,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야구장에도 가고, 함께 ‘스타워즈’ 레고도 조립하고, 각종 장르영화를 섭렵하는 동시에 밤새 생선회에 소주를 마실 수 있는 술친구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나와 취향을 공유하고,그 취향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솔직히) 예쁜 사람. 위의 사례에 등장한 매기는 그런 나의 이상형적인 ‘딸’에 가장 부합하는 아이였다.(인터넷에 검색해 보라. 매기도 예쁜 아이다.) 고정된 성역할과 관념에 대한 반발심? 그건 아닌 것 같다.다만 나는 내 아이가 세상이 규정한 성역할 때문에 피해를 입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현 세대의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성역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교육 2가지가 매기의 사례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모든 사람의 몸과 마음에 체화된 ‘성역할’이란 관념은 어차피 한 세대의 일생으로 뒤바뀌거나 사라질 수 없다. 그 관념이 생겨나서 굳혀진 것은 수많은 세대의 일생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다만, 지금은 성역할이란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대다. 단순히 제도적으로 직장 내 성차별 문제를 근절하는 차원이 아니다. 수많은 남성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통해 미국 문화를 지배했던 마블과 DC코믹스는 최근 여성 슈퍼히어로(이 경우에는 슈퍼히로인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캐릭터 개발을 늘리고 있으며 ‘레고’와 같은 장난감 사업도 여자아이들을 위한 타켓팅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이전에는 남성 고객만을 상대하던 자동차, 아웃도어, 스포츠 등의 상품도 여성친화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중이다. 물론 그럼에도 세상에는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하고, 그런 관념을 입 밖으로 내놓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SNS 시대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바로 집중포화를 맞는다. 사람만이 아니다. ‘데이트 폭력’의 원인 중 하나를 “남자가 주로 지불하는 데이트 비용”으로 규정한 성교육 자료를 배포한 교육부도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런데 마블과 DC가, 자동차 업계와 아웃도어 산업이 성역할 관념에서 탈피하려는 지구적인 움직임에 동참하고자 변신을 시도한 걸까? 그럴리 없다.이유는 돈이다. 돈이 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성역할의 관념으로 규정된 취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취향을 갖게 된 후, 거기에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 등장한 매기의 경우, 배트맨과 슈퍼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뿐만 아니라 TV시리즈 '더 플래시(The Flash)의 팬이었다고 한다. 아마 매기는 어른이 되면, '데드풀'처럼 좀 더 성인취향이 가미된 슈퍼히어로까지 보고 즐길 것이다. 돈을 벌면 멋진 자동차를 구입해 도로 위의 스피드를 즐기거나, 방안을 각종 피규어로 채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매기의 부모가 아이의 취향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게 했다면 어땠을까?


제도적으로 성역할 관념에 따른 불이익을 근절시키고, 사회문화적으로 성역할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사례를 감소시키는 상황을 조성했다면 우리가 지구에서 사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내 아이가 생물학적인 성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취향을 갖고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일 것이다. 사람의 취향이란, 결국 그가 돈을 쓰는 방향이다. 사람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돈이 흐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내 아이가 성인이 되어 갖게 된 돈을 쓰는 방향이 세상의 긍정적인 변화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매기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육은 ‘발언을 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안내문에 불쾌감을 느낀 아이의 마음을 단순한 투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엄마의 태도가 눈에 띄는 건 이 때문이다. 그녀는 직접 아이의 사진을 찍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알렸으며 이 일로 변화가 일어난 상황을 아이에게 체험시켰다. 아이가 아무리 다양한 취향을 가졌다고 해도, 아이가 세상이 요구하는 성역할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성장한다고 해도, 아직 성역할의 관념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세상은 분명 끊임없이 아이를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이때 불쾌한 것을 불쾌하다고 말하지 못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의 논리안에서 참고 사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이러한 수순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불쾌감을 드러내면 변하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나는 내 딸에게 로봇을 쥐어주고, 아들에게 바비인형을 쥐어주면서 고정된 성역할로부터 탈피하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 아이가 그런 관념보다 더 단단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매기는 그런 내 마음을 안심시키는 아이였다.


이 글은 <베이비> 2015년 10월호에 기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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