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언더 그라운드'를 읽던 도중 '어느 가족'을 봤다
*이 글에는 영화 ‘어떤 가족’에 대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태풍이 지나가고’(2016) 이후 당분간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었다. 사실 그래도 될 만큼 그는 가족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이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까지 연달아 가족영화를 만들었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이전 영화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들을 그리 호의적인 태도로 보지 않았다. ‘원더풀 라이프’(1998)와 ‘아무도 모른다’(2004),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2008) 처럼 인간의 생명력과 서늘함을 동시에 진동시키는 작품들에 비해 마냥 따뜻한 영화라는 이유였다.
어쨌든 고레에다는 자신의 선언 이후 법정 스릴러 영화 ‘세번째 살인’(2017)을 만들었다. 자신의 선언을 강조하듯, 이 영화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살인장면으로 시작한다. 인간이 품은 진실에 우리는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가, 진실을 알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심판할 수 있는가, ‘세번째 살인’은 사법 제도뿐만 아니라 인간을 향한 신뢰에 대해 소름 끼치는 질문을 던졌고, 이제 가족영화를 만들지 않기로 한 그의 다음영화를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품고 있던 칼을 이제 마음껏 드러낼 것만 같았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원제 좀도둑 가족, 万引き家族)을 통해 바로 가족영화로 돌아왔다.
이런 재빠른 태세전환에 대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번 영화는 같은 가족 드라마지만 ‘집 안’에서만 무언가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과 사회의 접점에서 일어나는 일들, 거기서 생기는 마찰을 그리는 시선을 취했다. 그러다보니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작업하면서 오히려 가족 드라마로 돌아갔다는 의식은 크게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어느 가족’은 정말 가족영화처럼 시작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슈퍼마켓을 찾은 어떤 성인 남자와 어린 소년이다.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슈퍼마켓 안의 물건들을 훔친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족들과 함께 먹을 고로케를 구입한다. 다정하게 고로케를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부자관계다. 그때 이들의 눈에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들어온다. 대사를 들어보면 이 아이는 최근 자주 현관문 밖에 나와 있었는데, 두 남자는 어린 아이가 추운 날씨에 밖에 있으니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그들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집에는 더 많은 사람이 있다. 소년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빠와 엄마, 할머니, 이모가 있는 것 같다. 여자 아이는 음식을 얻어먹는다. 부부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아이의 원래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현관문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이 아이는 자신의 가족들과 살면서 그리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는 이들과 하룻밤을 보냈고, 이불에 오줌을 싼다. 그렇게 가족(처럼 보이는 구성원)이 된다.
‘어느 가족’이 첫 시퀀스에서 소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가족같다. 영화를 보는 관객과 영화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그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한 아이가 새롭게 가족의 구성원이 된 순간부터 이야기를 진행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이 가족의 탄생기를 알려준다. 관객들은 그제서야 이 가족이 조금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한다. 아이는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않았고,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 이모에게도 이모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 다시 돌이켜보면 이 가족 가운데 가족의 호칭이 허락된 건 할머니뿐이다. 모두가 할머니에게만은 할머니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머지 구성원은 서로에게 가족의 호칭을 쓰지 않는다.
가족의 탄생기를 역으로 되짚는 이야기의 구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영화에서 본 적이 없던 형식이다. 그의 가족영화가 바로 가족의 탄생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바뀌는 사건을 통해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서로를 가족으로 자각하게 되는 이야기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낳은 아이를 동생으로 맞이하는 이야기였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태풍이 지나가고‘는 피로 엮인 가족이 이혼 등으로 분열된 후 그런 현실을 인정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서로의 존재를 더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여기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전에 그렸던 가족과 ‘어느 가족’의 가족이 가진 차이가 드러난다.
이전 영화의 가족이 진짜 가족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가족처럼 보이게 되는 사이라면, ‘어느 가족‘의 가족은 진짜 가족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니 진짜 가족이 아닌 사이다.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전혀 다르다. ‘어느 가족‘의 형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가족에 대한 관성과 다르게 움직인다. 이 관성이란 중년의 남녀와 아이가 함께 있으면 무조건 그들을 가족으로 보는 것과 같다. 한 여성과 아기가 함께 있으면 무작정 “아이가 엄마랑 똑닮았네요”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이들이 피로 이어진 진짜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관성‘은 작동한다. 그들에게는 아마 우리가 모르는 사연이 있을 텐데, 그 사연은 매우 감동적이고 따뜻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관성이다. 이런 관성은 특히 가족을 그리는 영화에서 더 크게 작용한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 이 후자의 관성도 깨버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이 가족이 된 사연을 모호하게 드러낸다. 관객에게 던지는 힌트들로 따뜻한 가족의 탄생기를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무서운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이때부터 등장인물의 이름과 함께 생각해보자.) 아빠 역의 오사무 시바타(릴리 프랭키)와 엄마 역의 노부요 시바타(안도 사쿠라)는 왜 할머니 하츠에 시바타(키키 키린)와 함께 살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이들이 자신이 받는 연금 때문에 같이 산다고 말한다. 처제 역의 아키 시바타(마츠오카 미유)는 오사무와 노부요가 함께 사는 이유가 ‘돈’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우리는 ‘관성상’ 돈 때문이 아니거나,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현재 함께 살면서 보여주는 진심과 따뜻함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에는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는 알 수 없다.
할머니 하츠에가 남편이 다른 여자와 낳은 아들의 딸 아키를 집에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가 돈 때문에 아키를 데려온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가족을 뺏은 사람들에게 다시 가족을 뺏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오사무와 노부요가 처음 쇼타와 함께 살게된 계기도 의심스럽다. 노부요는 추운 겨울 혼자 자동차 안에 있던 아이를 구했다고 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는 아이를 데려가 키우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자동차에서 구조한 아이에게 친부모를 찾아주지도 않았고, 아이를 경찰에 데려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영화 속의 현재, 지금 그들은 가족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과거의 그들은 각자 품고 있는 욕심과 욕망에 의해 서로를 연결했을지도 모를일이다. 그랬던 이 가족이 새롭게 들어온 유리(혹은 주리, 혹은 린)의 존재로 인해 변화를 겪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 유리는 처음부터 자신이 아닌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으로 연결했던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의 이야기에서 ‘관성‘이란 말을 떠올리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때문이었다. 지난 7월 6일, 도쿄지하철사린테러 사건의 주범인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와 일당들이 사형집행을 당한 후, 하루키가 쓴 ‘언더그라운드’를 읽기 시작했다. 1년 9개월에 걸쳐 당시의 사건 피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을 담은 이 책의 끝머리에서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옴진리교는 악이다‘라고 말하는 건 쉽다. 또한 ‘악과 정상은 다르다‘라는 것도 논리적으로는 간단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논리로 정면에서 파헤쳐본들 그것으로 ‘승합마차적 콘센서스’의 주술을 풀기에는 역부족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모든 정면에서 모든 방법으로 이용될 대로 이용되어버린 언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벌써 제도화되어버린, 손때가 묻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방향에서 모색된 언어일 것이며, 그러한 언어로 말해야 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이야기를 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쓴 문장에서 ‘어느 가족‘을 떠올리게 한 부분은 ‘이야기를 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다. ‘세번째 살인’ 이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가족영화가 ”제도화되어버린, 손때가 묻은 언어”로서의 ‘가족‘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였다면, ‘어느 가족‘은 그런 손때가 묻은 ‘가족이란 관성’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아닐까? 마치 ‘가족‘이란 관성을 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를 제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들었던 가족영화들까지 정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족‘에서 보이는 이런 태도가 이미 ‘세번째 살인’에도 보이기 때문이다.
‘세번째 살인‘의 주인공인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또한 ‘가족‘에 대한 관성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는 미스미(아쿠쇼 코지)와 각자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후 미스미에게 살해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를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미스미의 흔적을 쫓아가던 중 미스미와 사키에가 함께 홋카이도에서 부녀같은 관계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거라 믿고, 그래서 미스미가 사키에 대신 복수를 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게모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자 미스미는 ”좋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때의 어조를 조금 더 더듬어 보자면, “(그냥) 좋은 이야기”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만, ‘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미스미에게 동질감을 느낀 시게모리가 ‘가족‘에 대한 관성으로 상상한 ‘좋은 이야기’일 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좋은 이야기‘를 그려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이전 작품에서도 나타나는 풍경이다. 첫 장편데뷔작인 ‘환상의 빛‘(1995)에서도 주인공 유미코는 자살한 전 남편의 아이를 데리고 재혼한다.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은 엄마가 같을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다를 가능성이 많은 가족이었고,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료타(아베 히로시)는 아내 유카리(나츠카와 유이)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함께 키웠다. 그리고 료타의 집안식구들은 모두 그 아이를 피가 섞인 가족처럼 대했다. 그런데 ‘세번째 살인‘의 이 대목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이 만들었던 그 모든 가족의 이야기를 하나의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꼭 자기가 만든 영화를 부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느 가족’에 이르러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등장인물들을 ”제도화되어버린, 손때가 묻은 언어”들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만든다. 유괴와 시신유기의 혐의로 이들을 조사하는 경찰들은 제도화된 언어로 그들을 대한다. 유리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한 말을, 자신을 학대하는 엄마가 있는 원래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말로 해석하고, 이를 그대로 노부요에게 전달한다. 경찰들은 도둑질을 범죄라고만 생각한 후, 오사무에게 왜 아이에게 도둑질을 가르쳤냐고 추궁한다. 이때 도둑질을 자신이 아빠로서 아이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지식이라고 생각한 오사무는 ”그것 밖에 가르칠게 없었다”고 말한다. 영화가 가장 오랫동안 응시하는 노부요의 표정과 경찰의 언어가 부딪하는 장면은 더 아프다. 노부요는 ”꼭 낳아야만 엄마인거냐”고 묻지만, 경찰은 그녀에게 ”그래도 낳지 않으면 엄마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노부요는 그 말에 더 이상의 언어를 잃어버린다.
″낳지 않아도”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형제가 되는 이야기를 그렸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 그들이 현실의 관성과 부딪힌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한다. 이 장면에서 ”당분간 가족영화는 만들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바꿔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당분간 그런 좋은 이야기는 만들지 않겠다”고 말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좋은 이야기‘를 정화하기 위한 또 다른 이야기로서 ‘어느 가족’을 만든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에 이 영화는 너무 따뜻하게 시작해서 너무 아프게 끝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에게 익숙한 흐름을 뒤집은 후, ‘세번째 살인’에서 보여준 차갑고 집요한 태도로 인물들을 몰아부친다. 그는 그렇게 기존의 관성과 벗어나려고 애쓰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가족’에 대한 관성은 ‘어느 가족’의 인물들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좋은 이야기’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쉽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