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 (Boyhood, 2014)
영화 초반, 담벼락과 집 사이의 좁은 통로에 메이슨이 가만히 앉아있는 장면이 나온다. 가까이 다가간 카메라로 보이는 것은 작은 새의 시체. 주변 흙이 조금 패어있는 것으로 보아 묻어주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메이슨은 동작을 멈추고 죽은 새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내게 <보이후드>는 몇몇 특정 이미지로부터 확대되고 다시 연결된 형태로 기억된다. 가장 주요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포스터에도 사용된 겨우 여섯살 주제에 세상 다 산 것처럼 사색에 빠져있는 메이슨의 얼굴이 담겨있는 그 이미지가 될 것이다. 영화의 갈피를 예상하지 못해 다른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던 첫 번째 관람에서는 내내 이 이미지의 연장에서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어느 때보다 강한 감정이입을 경험했던 두 번째 관람에서 한 장면이 추가되었는데 글의 서두에서 말한 그 장면이다. 새의 시체는 보여주지만 특이하게도 새의 죽음(그 새를 메이슨이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메이슨이 그 시체를 발견하게 된 과정 그리고 흙을 마저 덮어주는 모습이나 묻어주고 난 후의 이야기 등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방식으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의도적으로 사건의 자극적인 요소들을 배제하고 있다. 12년의 시간 속 수많은 사건의 합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보이후드>가 개별 사건의 기승전결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내겐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좋은 사람이었던 그리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될 두 명의 양아버지를 그려내는 방법도 그렇다. 차고에 쓰러져있는 엄마 하지만 그녀의 외침에 메이슨은 자리를 피해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간다. 곧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양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스쳐 지나갈 뿐이다. 습관적 음주를 암시하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화목하고 행복했던 그들 가정이 혹은 철저했지만 온화했던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은 영화 속에서 철저히 생략되어 있다. 메이슨과 사만다가 엄마와 함께 도망쳐 나온 후에도 그 집에 그대로 남아야 했던 의붓남매에 대한 언급은 '어쩔 수 없다'라고 마무리되는 정도다.
파티에 참석한 후 늦게 귀가한 메이슨에게 두 번째 양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지켜야 할 룰을 강조한다. 이미 엄마에게 늦은 귀가와 음주에 대한 암묵적 허락(?)을 받았던 메이슨은 당신은 아빠가 아니라는 대답으로 그의 말을 거부한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대분의 사건이 그렇듯이 특별한 충돌 없이 마무리되고,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엄마가 다시 이혼을 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학교에서 메이슨을 향한 괴롭힘도 꽤나 지속될 것 같은 뉘앙스이지만 단 한 장면에 불과하고, 대학을 가기 전 메이슨이 겪은 결별의 과정 역시 생략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기쁨의 순간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화는 내내 메이슨과 등장인물들의 삶에서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조망하며,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이 사건이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화법을 피하고 있다. 링클레이터는 인생을 그려냄에 있어 몇몇의 특징적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주변부나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여물로부터 추적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인생에는 죽을 만큼 슬프거나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쁜 감정들이 존재하긴 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감정들도 있다. 하지만 처음 그대로 크기가 지속되는 감정이란 없다. 모든 기억과 감정은 지워지거나 혹은 남아있더라도 무뎌지게 마련이다. 메이슨에게도 마찬가지. 그에게 닥쳤던 많은 일들이 당시에는 엄청난 아픔과 혼란을 줬을지라도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감정이 희석된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양아버지는 엄마의 공부를 도와준 그리고 두 번째 양아버지 역시 카메라를 사준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고, 이별 역시도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특정 사건을 강조해 감정의 고조를 만들어내려는 보통의 영화들과 달리 <보이후드>는 의도적으로 사건과 감정이 폭발하는 지점을 걷어내고(혹은 지나치고) 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메이슨의 성장과정을 지켜본 우리가 그 뒷이야기를 계속해서 궁금해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삶이란 영화처럼 자극적이지 않은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