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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애 Apr 30. 2018

<내일을 위한 시간> : 관찰의 미덕

내일을 위한 시간(Two Days One Night, 2014)

<내일을 위한 시간>은 자신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택한 직장 동료를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한 산드라의 1박 2일을 따라다니지만, 산드라의 편에서 관객을 설득하려는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나는 이점이 <내일을 위한 시간>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한다.


사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스토리나 주인공의 사정 그리고 전체적인 스토리 혹은 개연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정을 제외하면 관객들이 등장인물들의 속사정을 소상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앵글 뒤에 감춰진 선택과 집중에 따라 영화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을 중심으로한 이야기만 액기스처럼 남는다. 작은 캐릭터가 눈에 밟히거나 기억에 남을 때는 순간의 강렬한 인상에 의한, How 없이 What 만 남는 상태가 대부분이다. 



이런 측면에서 <내일을 위한 시간>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꽤나 흥미롭다. 산드라에게 감정의 고조와 기복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설득이라는 하나의 패턴을 두고 동료들과 반복적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산드라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못하고), 동료들도 획일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실망의 순간이 찾아오긴 하지만, 산드라도 보너스를 선택하는 동료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그녀의 여정은 설득의 과정이라기보단 차라리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지 타인의 사는 모습을 관찰하는 관찰카메라에 가깝다. 한글 제목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원제 <Two Days One Night>이 영화의 성격에는 좀 더 어울린다. 제한된 시간 동안 정해진 인원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 등 어떤 면에서는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노한 사람들> 류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들 작품이 일방적인 (때로는 강압적인) 설득인데 반해 <내일을 위한 시간>은 소통과 이해의 과정이다.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직접 이해당사자인 산드라도 그녀를 지지하는 동료를 절대선이라 주장하지 않고, 반대로 보너스를 선택하는 이들도 절대악이라 상정하지 않는다. 또한 악인으로 충분히 묘사 가능했을 법한 회사 사장도 투표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선과 악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 속 대립구도는 선과 악의 대결보다는 자본의 논리에 맞서 싸우는 자와 순응한 자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마지막 산드라의 선택이 지극히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선택이라 결론이 너무 영화스럽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 산드라의 얼굴이 유난히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한 이유가 어떤 거대 담론이나 대의 때문이 아님을 알기에, 그녀가 절대 선의 입장에서 당위적으로 내린 결론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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