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는 의외로 당장 내보낼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 회사도 고통을 많이 입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회사를 거치면서 고통받았고, 그들도 그에 대한 반응으로 회사에 상처를 남겼다.
이해한다. 그러나, 회사를 이해해야할 대상은 아니다. 회사는 회사일 뿐, 고용계약이 끝나면 어차피 남과 남이다. 계약관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이해를 할 필요는 없다. 과도한 이해는 나를 곤경에 빠뜨릴 것 같다. '도리를 다한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살아왔지만, 여기서는 피고용인으로써의 '권리'와 '의무'를 계속 확인하며 다니게 된 것 같다.
회사 일이 너무 바쁘면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우선순위에 따라 업무를 처리 하는 것은 효율적인 것이다. 그런데, 밀린 업무 중에 납기가 지나버린 업무가 있다면? 그것은 빵꾸다. 그런데 밀린 업무 중에 납기가 지났는데, 당장 나에게 큰 피해가 없다면? 안걸리고 넘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사실 지난 글을 쓰고 난 다음날, 회사의 인사팀장님에게 퇴사하겠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회사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인사팀장이 보고를 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오늘 밝혀졌다. (대표님이 신규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오늘 회의에서 말씀하시는 걸 듣고, 인사팀장을 쳐다봤고,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이내 눈을 떨구었다)
인사팀장이 바쁘니까 그럴수 있지라고 넘어가고, 도와준 일들이 왕왕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기분이 별로였다. 내 favor가 이렇게 낭비되고 있었다.
인사팀장을 따로 불러내 얘기를 나눴다. 나는 2주전에 분명히 얘기했음을 거듭 강조했고, 이번달말까지만 다니겠노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솔깃한 제안을 했다. 말하자면, 돈 조금 적게 받으면서, 일 조금 할 생각은 없느냐였다.
순간 귀가 커졌다. 그런데, 그 다음 말에 눈도 같이 커졌다.
'지금 같이 일하고 있는 oo씨를 정리하는 조건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기가 찼다. 내가 뽑은 얘를 내가 자르라고? 그리고 나 좀 편하게 다니자고, 사회생활 어렵게 시작한 중고신입을 자른다고?
물론, 인사팀장님이 비밀은 지켜주실테니, 이 딜(?)이 소문나진 않을테고, 그럼 oo이도 이 내막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른다고?
얼마전에도 oo씨와 밥을 먹으며, 열심히 재기(?)해보라며, 응원을 건네던 나였다.
편하게 다니게 해주겠다는 말은 사실 달콤했다. 인생사 그리 즐겁지도 않고, 나이도 제법 그득하게 들어가던 터라 편한것만 찾는 요즘이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싫었다. 이렇게 그 친구의 회사생활을 정리하는 건.. 내 도리가 아닌거 같았다.
30초정도 정적이 흘렀다. 인사팀장은 내 대답을 기다렸고, 나는 순간 많은 생각들을 했다.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나 좀 살자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 회사의 속성상 계속 나를 흔들어제낄것이 자명했다. 가만둘리가 없다.
말하고 나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는 순간 이내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내가 실수하는 거 아닌가? 도리는 무슨 도리...'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백수가 된다면, 우리 아이들의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아내를 다시 가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아니, 이미 어느정도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아내에게 그 무게를 가중시키고 싶지 않다. 현금이 필요한 것은 fact다.
그렇다고 다시 번복하자니.. 가오(?)가 너무 없어보였다 ㅡ,.ㅡ
답답한 마음에 키보드를 탕탕 치다가, 문득 모니터 앞에 있는 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안경은 안경인데, '전자파 차단용 보'안경이었다.
안경알에 묻은 지문을 닦으며,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뭐 oo이에게는 투명하게 이런 저런 얘기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내 코가 석자이긴 하나, 그래도 재기하는 친구에게 진심어린 얘기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좀 좋았다.
만약에 딜(?)을 받아들였다면, 그 친구에게 충고는 못할 것 같았다.
중요한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실리를 챙겨 사람은 잃더라도 현금흐름을 확보해 놓는게 우선인지..
아니면 실리를 챙겨 현금흐름은 잃더라도 사람을 얻는게 우선인지..
내 눈에는 둘 다 실리다. 아직은.
나중에 무엇으로 덕을 볼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람을 얻는 게 우선인 것 같다.
단기적으로는 좀 힘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