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들 + 남편 + 아빠 + 회사원입니다. 계속 글을 쓰고 싶습니다."
나의 브런치작가 소개글이다.
여기서 회사원이라는 글자가 요즘 간당간당하다.
사실 요즘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또 다시 이직을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구상해볼 것인지 말이다.
회사 다니면서 생각해보면 되지 않나 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삶이 매우 바쁜 편이다. 어느 쪽 (가정, 직장, 교회)의 시간을 줄이지 않는 이상 Solid한 생각이 나올 만한 room이 거의 없다. 물론 멀티 태스킹이 잘 안되기도 하고, 성정상 '월급루팡'도 너무 불편하다. 뭔가 하고 대가를 받아야 마음이 편안한 면이 있다.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다'라는 이 1문장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생각보다 많지만, 간단하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 경제 활동을 하고 있다.
- (어느) 회사에 다닐 정도로 능력이 있다.
이 두가지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바라면, 정작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는 어떤 생각과 기대를 가지며 다녀야 할까?
'빨리 열심히 일해서 높은 연봉과 지위를 받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요즘에 별로 없는 것 같다. 높은 연봉은 땡큐지만, 지위에 따른 책임은 옛날보다 더 날카로워진 것 같다. 옛날 말처럼 회사는 손해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이 가져간다.
'이곳이 나의 평생 직장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 나는 이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지만, 요즘 젊은 분들 중에 벌써 나와 비슷하게 많이 이직하신 분들이 종종 보인다.
'회사에 다녀야 현금흐름이 나온다'라는 생각은 사실 회사생활을 버티게 해주는 최전선인 것 같다. 그렇다면, 회사에서 가져갈만 한 기쁨은 사실 기여도에 비해 낮다.
'내가 이곳에서 뭔가 해보리라'는 동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다닌다면, 그 회사에는 정말 복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회사야 말로 뭔가 변화를 이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것 같다. 회사를 이러한 마음으로 다닌다면, '현금흐름'에 대한 생각도 보다 공격적으로 바뀌고, 나아가 '높은 연봉'이 이제는 본인의 수고에 대한 reward를 책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다'라는 말은 어찌보면 겉치레일 뿐이다. (얼마나 편리한가? 그 한마디가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의미, 또는 안전장치들) 결국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내가 얼마나 열정이 있느냐가 결국 회사를 다니는 목적과 기대가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2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치 널빤지가 바닥에 있는데, '회사원'이라고 쓴 널빤지만 골라서, 서있으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보였다.
일단 안전하게 그 널빤지 위에 서 있어야 '휴~'하고 안심되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그 널빤지가 사금사금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어서, 나의 넥스트 스텝을 계속 걱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 10년 뒤에 너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모습에 대해 이 널빤지도 그리 뚜렷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널빤지의 관심사가 아니다.
싸늘한 점은 널빤지는 내가 아닌 다른 누가 와도 개의치 않는다. 내가 아니어도 누가 와도 된다.
현재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는것은 10년뒤에 내가 그때 뭘 해보려고 하는 것 보다 지금이 더 에너지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뭘 해보는게 낫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아 물론 우리 가족들을 다 손가락만 빨게 할 정도로 생각 없이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_- ; 그래도 risk taking이라면 risk taking이니까. (남들과 다른 길이면 일단 risk로 인정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 같다)
자녀들 안전하게 대학까지 보내놓고 그때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게 10년을 아무생각없이 버틸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무채색의 삶을 살기에 나는 의미를 찾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
결국 널빤지를 내가 만드는 것 밖에 이제 카드가 안남았다.
이제 이직은 이제 더 이상 유용한 옵션이 아니다 (가려면 갈 수 있겠으나, 똑같은 고민의 소용돌이에 결국 빠질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인데, 주위를 둘러보면 다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부분 '어쩌겠냐 이렇게 라도 해야지' 라는 결론들을 나름 잠정적으로 내리고 있다.
아니다. 사실 그들도 결론이 내려지진 않았다. 그들은 매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출근길과 퇴근길에, 그리고 회의 할때, 야근 할때. 그리고 매일 그 질문에 똑같은 답을 하고 있다
'어쩌겠냐'
#3
얼마전 교회에서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 들었다.
처음엔 이 기도가 하고 싶지 않았다. 웬지 질투났다. 그리고 상당히 이기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보니, 그게 아니란다. 구하지 않는게 교만이라고 한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혼자서 다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하는 것은 겸손의 표현이지 이기적인게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그 구함을 통해 기도의 방향은 정제되어져 간다고 한다.
(오오.. 점점 알아 갈수록 심오한 기도의 세계다.)
나 역시 '어쩌겠냐'의 수렁으로 빠지려고 하다가도,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들으면 손을 뻗어 그 메시지를 한움쿰 잡게 된다.
내 마음이 사실 원하는게 이거니까.
우리는 모두 복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이 말씀을 품고나면 또 마음이 두근두근 해진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꿈이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 말하게 된다.
그래.
한번 해보자.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시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장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