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인계를 발표하라고?!
#1
"인수인계 발표를 하라구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인수인계 발표?
직장생활 18년 넘게 했는데, 이직을 14번했는데, 인수인계내용을 발표하라는 내용은 처음이었다.
용어가 낯설정도였다.
손이 덜덜 떨리고, 속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나는 지난 12월부터 회사에 퇴사입장을 밝혔다. 다만 후임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회사에 공백이 생기면 안되기에 조금 더 있기로 한거였다. 퇴사날짜도 인사팀장과 얘기 후 0월0일로 해놓은 상태였다. 사실 이번주다.
그런데, 퇴사를 남겨두고 인수인계를 발표를 하라고?
이게 배려의 대한 대답인가?
인사팀장과 얘기를 하는데 내 목소리가 커지고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다. 퇴사를 몇일 앞두고 인수인계 발표를 하라니, 이게 말이 되느냐. 지금까지 회사를 생각해서 남았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인사팀장은 역시 사측인지라 똑같은 말만 했다. 그냥 가볍게 하고 마무리 하는 것으로 생각하셔라라고 말이다. 사측을 대변하는 그의 얼굴이 밉기까지 했지만, 사실 인사팀장하고는 친분이 없진 않았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는 건 서운했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 서로 평행선인 거 같아 일단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자리에 앉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를 보자기로 봤구나라고 생각했다.
억울함과 그동안의 배려가 다 내 팽게쳐지는 느낌이었다.
호의가 권리로 바뀌었구나 싶었다.
그래 이럴수는 없었다.
이건 바로 잡아야 하는 부분이었다.
(더 보자기가 되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10분뒤 다시 인사팀장에게 찾아가서 말했다.
"그럼 인수인계발표로 마무리하고, 저는 예정된 퇴사날짜인 이번주 00일에 나가겠습니다"
인사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계속 말했다.
"대표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려도 되죠?"
인사팀장이 정 원하시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2
대표님께 문자로 말씀을 드렸다. 솔직하게. (문자로 보고되는 게 용인되는 회사다)
'지시하신대로 인수인계발표는 하겠다. 오겠다고 한 후임자가 오지 않아 1~2주 더 근무할 생각이었는데, 발표를 하라고 하시니 좀 당황스럽다. 그럼 저는 이번 인수인계 발표로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고, 퇴사일에 퇴사하겠다'고 했다.
5분뒤.
문자가 왔다.
'퇴사날짜 얘기 들은적이 없네요. 언제 퇴사한다는 거죠?'
"헉"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왔다.
알고보니 또 인사팀장이 얘기를 안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또 말이다. 그때는 퇴사얘기를 안하더니, 이번에는 퇴사날짜를 얘기를 안한 것이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대표가 무서워서 얘기 못하는 건 이해 하겠지만, 피해자가 나다. 아오....
대표한테 1월부터 날짜를 얘기했다고 하자, 대표는 더이상 문자로 답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답이 없다;;)
어찌되었든 이제야 수수께끼가 풀렸다.
대표는 아마 내가 날짜통보없이 그냥 노는 사람으로 봤던 것 같다. 월급루팡같이 말이다. 그러니 뭐라도 시킬 심산으로 인수인계발표를 시킨 것 같다. (그래도 인수인계 발표라니... 신조어다 이건)
아니 그럼
'인사팀장은 왜 얘기를 안한 걸까?
나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할때 왜 그냥 잠자코 있었던 걸까?
그런 얘기를 못할 정도로 위협을 받고 있는 걸까?'
내 안에 질문이 계속되었지만, 소용 없었다.
이미 이야기는 여기까지 진행되어 온 것이다.
되돌아간들, 감정만 상할 뿐이다. 팩트 확인은 다 되었다.
마음에 일었던 파도가 슬슬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이러한 운영방식은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만 얘기가 안된 걸까? 의사결정을 위한 자료가 의사결정권자에게 다 전달이 되지 않는 것 말이다.
마치 옛날 어느 동화에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신하는 살리고, 나쁜 소식을 전해주는 신하는 죽이는 왕처럼
비슷하게, 여기도 흘러가는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3
상황 파악이 되니 그날 오후부터 마음에 안정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사실 생각보다 마음이 크게 동요하진 않았던것 같다. 화를 내긴 했지만, 사리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극도의 분노는 아니었다. 화가 날 정도여서 화를 낸 정도였다. (화가날만 하지 않은가?) 심장이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다.
지하철에 선 퇴근길. 내가 어떻게 마음에 평정으로 돌아왔는지 생각해보았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잠언 20:5)
이번 주일 말씀이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미래가 너무나 소중하다.
나의 미래를 위한 모략을 끌어낼 수 있는 내 마음이라는 기관을 더 이상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억울해.'
그래, 그래서 뭐?
억울한 것을 분풀이해서 마음을 분탕질 해놓는 것이, 모략을 길어내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그럴리가 없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3)
사랑하는 내 아내, 딸들을 안고 사랑을 내 마음에 먹이는 것이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들의 위로로 채우는 것이 마음을 분탕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게 끝이 아니다.
It's not over till it's over
그래, 내일이 있어서 오늘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PS.
아마 조만간 고용계약 해지의 결말이 나올 것 같다.
기도하며, 그 결말을 기다려본다.
그리고 Next Step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