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줄에 묶인 코끼리
#1
금요일 저녁 6시.
인사팀장이 빙그레 웃으며 내 자리로 찾아왔다.
일을 열심히 한지라, 나름 보람찬 상태여서 나도 빙그레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그런데 빙그레 웃는 얼굴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왔다. 의역하면 이런 말이었다.
' (인수인계 못 받은 건 알지만)기존의 자료 내역들을 모두 다 정리해서 대표님께 보고하라는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
순간 화가 치밀었다.
여태까지 회사를 배려해서 이렇게 까지 근무 기간을 연장해주고, 인수인계 발표(? 지난 글 참고)도 하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정리해서 보고를 하라고? 이미 퇴사 입장을 밝힌 사람한테? 그것도 과거데이터를 모두 정리해서?
더군다나 그 말을 전하는 팀장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빙그레 웃고 있다. (실실 쪼개면서 말이다)
" 와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닌가요?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잖아요 부장님! "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결국 '대표님이 그렇게 하래요 난 몰라요' 라는 대답으로 일관되었고, 앵무새 같은 그의 답변을 더 받아줄 용의가 나도 없었다. 어차피 우리 둘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2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생각했다.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그냥 뛰쳐나가면 되지 않은가?'
'무엇을 이렇게까지 하는가?'
멍하니 생각이 들었다.
아 ㅎㅎ 어딘가 잡혀있구나.
"두려움 1번, 너의 이름은"
아직 나는 이직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
어디든 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보부상처럼 보통 2~3년, 짧으면 몇 개월씩 근무하는 이 패턴을 보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정상이 아닐수도 있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고민 속에 놓여 있다. 꽤 진지하게.
예전 같으면 '아 그런 부유한 고민 나중에 하고 일단 가자 어디든' 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원했었다. 아니면 '와 나 정말 이거 해보고 싶다. 이거 돈 벌면서 배우고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지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둘다 아니다. 어디든 가고 싶지도 않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번아웃증후군을 조심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긴 했지만, 여튼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돈이 필요한 건 당연한 사실이다. (우리집은 부유하지 않다 ㅎ) 그런데 무작정 갔다가 다시 나오기까지 겪는 심경의 변화와 삶의 변화는 예전처럼 그리 호락하진 않다. (아마 이것은 나이 탓일 수도 있겠다).
"빨리 가자 빨리 어디든!"
그렇다. 뭔가 목적없이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 그런게 어딨어 그냥 다 사는 거지' 라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의 성정인지 견딜 수가 없다.
의미를 찾지 않고서는 배기질 못해겠다. 그리고 이제 답 찾는 것을 미룰만큼 미룬 듯 하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지금, 어쩌면 남들이 하지 않는 고민을 사서 하는지도 모른다.
굳이 지금? 가정에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갈 때인 지금? 아이들이 안정화 되는 때인 지금?
ㄷㄷㄷㄷ 글을 쓰면서도 동의가 된다.
그런데 말이다.
만약. 이 고민의 시간들을 통해 뭔가를 얻어낸다면.
목적지를 찾는다면. 나는 정말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그 길을 찾아나설 것 같다.
얼마나 기쁠까?
재화의 한정은 있을지언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것과 비슷한 삶.
생각만 해도 기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효..)
재정의 공급이 갑자기 끊긴다는 건 현실이기에 나는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 1번의 이름은 '고민이 수포로 돌아가고, 재정의 공급이 계속 끊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 두려움을 구체화하면, 그 두려움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든다. 이것은 심리학에 나오는 내용이다.
"두려움 2, 너의 이름은"
(현재 다니는) 회사에서 1년째 소송을 진행 중인 건이 있다.
의역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기존 직원이 무단 퇴사를 하는 바람에, 회사 프로젝트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회사는 그런 직원을 상대로 1년이 넘도록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온갖 이유를 다 붙여가면서. 변호사도 이건 성립이 어려울 거 같다는 건들도 아득바득 모두 진행시키고 있다.
더 웃긴 건, 문제의 원인이다. 무단퇴사했던 이유가 사실 그냥 '내가 이부분은 좀 미안했어, 하지만 너도 저 부분은 좀 그런거 같아(의역)' 라고 말하면 다 풀릴만한 문제인데, 정말 끝까지 간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보는 회사 직원들은 나를 포함해 모두 질려버렸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시범 케이스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 나이 때가 되면 이제 잃을 게 더 많아진다. 가족이 있고, 지킬 것들이 많아진다. 소송에서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인 것을 누가 엮이고 싶겠나?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계산이 선다면 나서지 않는다.
회사 파일을 정리하다 7~8년전 회사의 부당해고에 맞서 싸운 퇴사한 직원의 문서를 보게되었다. (변호사를 선임한듯 했다. 노동청으로부터 수령한 '이유서 답변 제출 요구' 문서였다) 내용을 보니 무시무시했다.. ㄷㄷㄷ 그때 부터 이랬구나 ㄷㄷㄷ
회사와 엮이지 않고 잘 나가고 싶었고 나를 무사히 놓아보내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뭔가 조종당하는 느낌이었다. 퇴사 의사를 밝혔는데, 나는 무언가 계속 눈치를 보고 있고, 회사는 줄기차게 일을 시키고 있다. 마치 나의 약점이 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또 그 일들을 꾸역꾸역 해내고 있다. 혹시나 봉변을 당할까봐 말이다.
두려움 2번의 이름은 '보복에 대한 두려움' 이다.
#3
집에 도착해서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분노가 가정으로 튀어나갈까봐 두려웠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오늘 내가 회사에서 안좋은 일이 있으니, 참고 부탁해' 라고 말이다.
싸이클에 올라타서, 무작정 유튜브를 틀었다. 뭔가 머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싶었다.
열심히 멍때리며, 페달을 밟고 있는데 아내가 와서 말했다.
'chat GPT에 물어보니, 퇴사 통보한지 30일이 지나면, 퇴사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데. 인수인계도 상관 없고. 사직서 결재도 필요 없고, 그냥 사직서 내기만 해도 된데. 사직서를 내지 않아도 퇴사한다고 구두로 통보했으면 30일뒤엔 퇴사 조치 된다고 하네. 걱정 내려놓아 여보'
아내가 구세주였다.
그동안의 나의 고민은 뭐였지 라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나는 왜 이리 묶여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진짜였다.
(민법660조 1항, 근로기준법 19조에 근거가 있었다.)
와..
아는게 힘이라더니.. 내가 왜 이고생을 하고 있나 싶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다.
마치 이런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완전히 묶여있었다.
Chat GPT에 물어볼 생각도 못하고,
분노에, 억울함에, 그냥 단순히 어떻게 빠져나올까, 왜 이런 상황인가에 몰두했던 것 같다.
두려움 2는 사실 걱정할 일이 1도 아니었다. 이미 퇴사 얘기한지 1달은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묶어 생각이 자유롭지 않았다.
글을 써놓고 보니 창피하기까지 하다.
왜 생각을 이렇게 했을까?
두려움의 힘이 정말 크구나 라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이 좁아지지 않게 이것을 관리해야겠다라는 마음도 든다.
두려움2가 사라지니 정말 가벼워졌다. 그리고 두려움1은 내가 건강하게 다뤄나갈 대상임이 인지되어졌다.
#4
퇴사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무사히 퇴사하여,
'근로계약해지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쓰길 바래 본다.
PS.
그러나 저러나, 이제 두려움 1만 해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