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가 행복의 충분 조건은 아니다
내가 전에 다니던 회사는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였다.
참고로 사모펀드 자산운용업을 영위하는 것은 엄청나게 돈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15억의 자본금 + 1~2년에 해당하는 운영자금 + 투자전문인력 3명만 있으면 된다. 금융업은 인가업이긴 하나, 사모운용사는 인가 받기 크게 까다롭진 않다. 다만, 요즘엔 메리트가 많이 떨어져서 그렇게 활발히 인가신청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금융업은 규제산업이다. 그래서 먹을 것이 많다고 소문나면, 곧 규제가 들이닥친다 ㅎ)
사모펀드이다 보니 규모도 작고 공모펀드와 다르게 당연히 수익자(펀드에 돈 넣은 사람들, 전문용어로 '쩐주') 수도 적다. 거의 쩐주 1명 또는 2명의 전용 펀드라고 봐도 될 정도로 그들만을 위한 펀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펀드를 운용해주는 작은 운용사들이 우리나라에는 생각보다 많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그랬다. 운용하던 펀드의 실질적인 쩐주는 1명이었다.
그분은.. 엄청난 부자였다. 일단 확인된 자산만 수백억원 정도 되었다. 그리고 우리 회사 같이 그분의 돈을 굴려주는 운용사가 여의도에 10개 정도 된다고 들었다.
전화 통화를 하게 되면, 그분은 언제나 나이스했고 합리적이고 냉철했다. 멋있었다.
(원래 운용역과 수익자는 전화를 하면 안된다. 그런데 암암리에 이렇게 통화가 이루어지곤 한다. 내 돈 들어갔는데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그 심정 이해는 한다)
한번은 그분을 뵌적이 있다.
뵙기 전 매우 설레였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냉철하고 지혜로운 분일까? 그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두근두근)'
'이런 쩐주 하나 잘 붙들어놓으면 인생이 참 편리하겠다.'
라는 생각들이 스쳤다.
막상 만나고 나니, 웬걸. 내 착각이었다.
첫 만남이라 인사와 약간의 업무지시를 기대했으나, 아니었다.
회사에 대한 불만과 현 상황에 대한 어려움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잔소리를 한 30여분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 사람이 내가 궁금하겠나? ㅎ 일이 궁금하지)
와 -
나는 놀랐다.
일단 내가 갖고 있던 환상이 깨졌다.
큰 부자는 왠지 굉장히 마음에 여유가 있고, 느긋하며, 지혜가 넘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 내가 아는 뭇사람들과 비슷하게 고민이 참 많으셨다. 이래서 걱정, 저래서 걱정 그래서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인생 참 힘들어' 라는 말을 들을때면 내심 속으로는 참 많이 갸우뚱했다. 돈이 이렇게 많아도 힘들면 힘들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얘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나는 이쪽 세계 사람, 저분은 저쪽 세계 사람, 이러면 이런 줄 알라는 식의 말투 (ㅎㅎㅎ 아오) 솔직히 계급이 느껴졌다.
- 그리고 가장 크게 느낀 건 불신이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느껴졌다.
'니가 날 보고 오겠어? 돈 보고 오겠지'
한 보따리 업무지시를 받고, 집에 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분 많이 외롭겠구나.
돈보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치 않은 사람도 있을텐데.
인생 참 어렵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분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을거다. 자수성가하시면서 인간관계에서 많이 데었을 것 같다. 주변의 질투와 시기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아마 일일이 주변을 케어하고 보듬어 주기보다는 고립을 택한 것 같다.
어렵다.
돈 많다고 다 좋은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우? 스스럼 없이 인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의 처지에 대한 감사함이 올라왔다.
그 이후 자주 연락이 왔다.
이건 했느냐,
왜 안했느냐,
저건 왜 이렇게 했느냐,
너 실수 없이 잘해야한다
(아 진짜 학씨 아저씨..)
돌이켜 보면 나름 인생에 대해 참 많이 배웠던 직장이었다.
그리고 가장 소듕한 배움은 이것이었다:
부자 딱히 안부럽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