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40s일기

병원 다녀온 날

by As the Deer

Intro.


검진날만 되면 떨린다. 두렵고 긴장된다.


혹시나 또 만약에 라는 생각이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불쑥불쑥 찾아온다. 물론 가족들에게는 '나 오늘 무서워'라고 얘기는 안 한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 오늘 검진날이여"라고만 말한다. 식구들을 걱정하게 만들기는 싫다.



나는 2년 전 피부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상당했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그 말을 들었을 때, 소설에서 자주 봤던 문장들,

"주인공은 가슴이 철렁했다"

가 바로 내 마음에서 일어났었다. 가슴이 철렁했다가 무엇인지 체감했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가슴이 내려앉는 느낌.


그러나 정말 감사한 것은 일찍 발견하고 크기도 작아서 거의 시술 수준의 수술로 암을 제거한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6개월 간격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있다.



Body 1


지난 수요일이 검진날이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1) 건물을 나서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우산을 썼는데도 양쪽 어깨는 물론 신발까지 다 젖었다. 그런데 차에 타자마자 비가 거의 그치더니, 병원에 도착할 때쯤엔 우산을 쓰는 사람들이 없었다. 왜 나만? 뭐지? (불안함이 + 20 되었다)


2) 차가 너무 많았다. 진료예약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나는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는 통로 어딘가에 서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기지? 오늘 검진날인데 (불안함이 +5 되었다)


3)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출입구를 향해 걷는 도중 커다란 벌레가 튀어나왔다. 큰 타원을 그리며 부우웅 소리를 내며 유유히 사라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소름이 쫙 돋았다. 하필 오늘 검진받는 날인데 이게 다 뭐지? (불안함이 + 10 되었다)



Body 2


의사 선생님을 뵈었다. 지난 2년 반동안 뵈었지만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에게는 너무 감사한 분이다.


검진을 하시더니, '이상 없다, 깨끗하다. 6개월 뒤에 한번 더 오고 그때도 이상 없으면 이제 안 오셔도 되겠다'라고 말씀하셨다.


불안함이 모두 삭제되었다.

감사함이 마음에 차올랐다.


계단을 내려가며 불길한 느낌으로 오전을 소비한 감정들이 아까웠다. 그전에 있었던 이벤트 1) 2) 3)은 그냥 자연스럽게 독립적인 이벤트로 결론 내려졌다. (이러면서 버려진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정신 차리자라고 자책했다 ㅎㅎ)



Body 3


진료비를 신용카드로 결제하는데, 여러 가지 생각과 마음이 교차했다.


암진단을 받은 후, 건강에 대한 자만심이 사라졌다. 끝이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끝이 생각보다 빠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마음으로 체감하지 못했던 영역을 알게 되는 경험이었다. 그리고 겸손함이 찾아왔다.


시간을 더 세밀하게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디테일하게 말이다. 바쁘니까 일단 이거는 대충 이런 거 말고. 구석구석 특히 여행 중에는 눈에 다 담아두려고 애를 쓴다. 시간에 대한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다.


특히, 사랑.


나의 관계 가운데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들 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들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뽀뽀할 날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 보면 아득하다.


그리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것, 이것은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시간 속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자 생기를 부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을 곧 나서려고 한다.


이제 잠시 후면 나는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꺠달음의 시간이 채워질수록 나는 더 성숙해지고 삶을 잘 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든다.


Outro.


병원에 들를 때마다 가는 곳이 있다.

바로 샌드위치 가게.

2년 전 처음 암진단을 받고 병원 내 샌드위치 가게에 가서 처음 참치 샌드위치를 먹었다.

당시 늦은 시각이라 다른 샌드위치는 다 팔리고, 참치 샌드위치만 남아있었다.


암진단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 가득 찬 상태로 먹어서 사실 아무 맛도 못 느끼고, 허겁지겁 허기만 채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났다.


참..


시간이 빠르다더니, 정말 그런 거 같다.

이렇게 또 시간이 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과 주어진 시간에 대한 감사함이 절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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