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재발견 #2_백수생활

by As the Deer


첫 퇴사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내가 출근하고 나면 일어나서 아점을 먹었다 (아내 얼굴 보기 민망한 적이 많기도 했고, 그냥 잠을 자기도 했다). 소파에서 뒹굴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 집밖을 나가곤 했다.


퇴사 초반에는 버스를 타고 강이나 호수를 보러 가곤 했는데, 이제는 감흥이 없어졌다. 밖에 나오면 그냥 어슬렁거리며 동네 주변을 걸어 다녔다.


오후 5시쯤 되면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내가 오면 같이 저녁을 먹으며,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아내가 어려운 일을 해내거나 무사히 마쳤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아내에게 감탄해주고 박수쳐주었다.


그러나 아내가 늦게오면, 그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내가 회식이라도 갔다가 늦게 오는 날이면, 왜 이렇게 늦게 오냐며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다. (근데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아내가 늦게 오면 그냥 싫다.. ) 그럴때면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나에게 한마디 했다.


'이제 내 마음을 알겠어?'


그럼 나는 화는 나지만, 할말은 없으니,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게임을 했다.

(문을 쾅 닫진 않았다. 내가 잘한건 딱히 없으니까)



어느날.


오후에 집을 나섰다.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데, 길 건너편 양복 입은 남자 두명이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한명은 박수치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조용히 소리내서 웃었다. 웃으며 옆을 무심결에 쳐다본 순간, 한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계신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머니는 약간 신기한듯 쳐다보는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치 '멀쩡한 놈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어? 일해야지'라는 느낌이었다.


흥.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엇.


엄마였다.


나도 놀라고 엄마도 놀랐다.

깜짝 놀란 엄마의 표정은 귀한 아들래미를 만난 기쁨으로 얼굴에 환하게 바뀌셨다.


연락 잘 안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니까.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 엄마가 뛰어오듯 내게 오셨다. 빛처럼 환한 얼굴로.

(웬지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너 이 시간에 왜 여기있니? 휴가냈어?"


"아 네 엄마, 휴가냈어요 ㅎㅎ 왠일로 연락도 없이?"


"아 너네 맞벌이라 바쁘니까, 청소하고 밥해주려고 왔지. 그리고 아들 보고 싶어서~"


"ㅎㅎㅎㅎㅎ"


마음이 참 많이 무거웠다.


그리고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다.


부모님에게는 나의 퇴사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말씀드려야지 하다가 결국 3달을 넘긴 것이다.


웃고 있었으나 웃는게 아니었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난생처음 아침 8시에 집근처 PC방으로 갔다.

혹시나 집근처 커피숍에 있다가 고향에 내려가시는 엄마와 마주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PC방으로 갔다.

허름한 건물의 2층에 있는 PC방이었다. 알바가 약간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창문이 활짝 열려있고, 바닥 물걸레 청소가 막 끝난 창가쪽 자리에 나는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는 출근하느라고 한창 바쁜 사람들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바쁘게 뛰어가고 있는 젊은 남자들.

아이의 손을 잡고 급하게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려는 중년 여성들이 몇몇 보였다.


나는 PC를 켰다.

그리고, 갑자기 마음에 고통이 밀려왔다.


'이게 무슨 꼴이지...?'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치심이 마음에 가득 몰아쳤다.


그러나 낯선 수치심은 아니었다.

나름 담담하게 수치심과 불편함을 막아왔던 벽이 있었다. 그 벽은 첫직장에 대한 퇴사를 결심할때 세워지기 시작한 벽이었던 것 같다. 벽의 이름은 '일단 건강하게 살고 보자'였다.


그러나

햇살 맑은 아침, 퀴퀴한 냄새와 간헐적으로 그 냄새를 씻겨주는 창문밖 바람이 교차하는, 허름한 건물 2층

PC방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양복 입은 내 모습은 그 벽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무언가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감정이었다.


조바심이었다.


나는 이미 건강해졌고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건 내 인생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던 외출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목이 늘어난 회색 츄리닝도 당연히 신경쓰였다.

친구들에게 전화했지만, 다들 바빴다. 한창 바쁘게 일할 나이니, 바쁜 것이 당연했다. 낮에 시간을 같이 보낼 만한 사람은 없었다.


내가 있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리고, 이 불안함이 생긴 이후, 변화가 생겼다.



아침 8시만 되면 눈이 떠졌다.


현관문에 아내 신발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먹다 남은 과자를 입에 넣으며,컴퓨터를 켜고, 이내 채용공고를 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구직사이트의 인터페이스가 바뀌어 있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정도면 갈 수 있겠다 싶은 기업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웬지 쓰면 붙을 것 같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어쨌든 대기업 경력이 작게나마 있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메리트는 있지 않겠나 싶었다. (사실 나름 믿는 구석이었다)


합격 가능성을 가늠해보며, 약간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지만, 또 다른 마음 한편에서는 서두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섣부르게 나를 직장에 맡기고 싶진 않았다.


섣부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약간의 흥분을 누그러뜨렸지만, 심사숙고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날 오후부터 바로 오퍼상관련 채용공고를 보기 시작했다. 일단 나 정도면 될 것 같은 생각이 있었고, 아니면 또 직장을 바꾸면 된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거의 무자본으로 혼자 할만한 것을 찾다 보니 이것이 적당해 보였다. 가서 일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일 배우는데 적당한데 가면되지.. 배우는 거니까.'


엑셀의 순환참조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더 큰 고민은 사실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빨리 '수트'를 입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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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금융사 00팀 근무.

스스로 보아도 자랑스러웠다.

너무 많이 지원하면 연락이 너무 많이 올까 봐 하루에 딱 2군데씩만 지원했다. 일단 규모가 있어 보이는 곳 위주로 2주 정도 여러 곳에 입사 지원했다. 웬지 이미 합격을 했는데도 연락이 많이 올까봐 걱정도 되었다. 너스레를 떨며 미안합니다를 많이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