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믿었던 경력이 별로 소용없는 것에 놀랐다.
여의도 금융사 근무가 취업의 문을 열어주는 열려라 참깨는 아니었던 것이다.
초조하고, 약간 두려워졌다.
이제는 서울에 소재한 모든 무역회사에 다 지원해 보기로 했다. 어떤 날은 20건 넘게 어떤 날은 50건 넘게 지원했다.
구직활동을 개시하고 거의 한달이 훨씬 지난 후 연락이 왔다. 사장님이 직접 전화를 주셔서 면접 보러 오라고 하셨고, 결과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합격이었다.
아내는 좋아했다. 아니 아내가 나보다 더 좋아했다. 아내는 만삭이었다. 그다지 건설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며 걱정하고 있었지만, 스트레스 받을까봐 얘기를 못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제서야 만삭인 아내의 배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화끈거렸고 미안했다. 내가 철이 없었다라는 생각에 약간 머쓱해졌지만, 지고 싶진 않았다.
이럴 때 쉬지 언제 쉬겠냐며 조심스레 말대꾸같은 하지만 하잖은 (?) 대답을 했다. 그리고 도망치듯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오랜만에 첫 출근이었다.
출근길이 이렇게 경쾌할 수가 없다.
출근하는 직장인 무리들과 함께 우루루 지하철 입구로 들어갔다. 좌우 앞뒤로 무표정한 직장인들에 둘러쌓여있었지만, 행복했다. 직장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큰 기쁨을 주고 있다. 다들 죽상이었지만, 나는 미소를 감추기 어려웠다.
출근길.
직장은 종로에 있었다. 무역회사가 빼곡히 모여있는 허름한 건물 안에 있었다. 예전에는 건물 하나를 통으로 다 쓰는 회사를 다녔는데, 건물 하나에 이렇게 많은 회사들이 모여 있는 것이 신기했다.
회사에는 5명 정도 근무했다. 예전 직장 XX팀 인원에도 못 미치는 인원이었다.
이 회사는 고래 사이에 있는 '새우'였다.
고래(해외 장비 생산업체)와 고래(국내 생산업체)의 중간에서 그들을 연결해주고, 계약을 통해 수수료를 받는 수익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궁금한 것이 이 회사가 왜 무역회사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왠지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래도 여의도에서 빡세게 근무하다 온 사람인데, 이런 5명 밖에 안되는 회사의 일은 식은죽 먹기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스스로 대기업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라고 생각했다.
나의 태도에서 그것이 드러났는지, 대표는 나에게 못마땅한 표정을 자주 내비쳤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태도 뿐만이 아니라 나의 능력도 문제였다. 금융회사에서 배운 지식 중에, 여기서 써먹을 수 있는 건 이메일 쓰는 것과 MS office 정도였다. 다른 건 다시 제로에서 시작해야 했다. 오히려 '모르는 건 솔직하게 빨리 대답하라'며 사장님께 꾸지람 듣기 일쑤였다.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하기만 했다. 내가 이래뵈도 여의도 금융권 출신인데 말이다.
어느날 우리 회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옆 회사의 고함소리가 들려올 때 나는 현타가 왔다. 직원들은 한숨쉬며 또 저런다 라며 키득키득했지만, 나는 납득이 안되었다.
예전에는 탕비실에 먹을 것이 한가득이었지만, 여기는 그런게 아예 없다. 예전에는 내 또래 비슷한 직장인들이 주변에 그득 했지만, 이제는 나 혼자였다. 편하게 대화 나눌 상대가 없었다.
그리고 격주로 토요일 오전에 출근을 해야했다. 물론 11시정도에 밥먹으러가서 점심먹고 헤어졌지만, 쌍팔년도도 아니고.. 토요일 출근은 말이 안되었다.
어느날 뽀루퉁하게 앉아 있는데, 대표가 회의실로 불렀다.
대표의 표정은 약간 격앙되어 있었으나, 어조는 차분했다.
간만의 배움이라 나도 매우 들떴고 재미있었다.
그 때 갑자기 대표가 질문을 하나했다. 단순한 % 계산에 대한 것이었는데,
나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해서 대충 대답했다.
순간 대표의 표정이 오만상 찌뿌려졌다.
"뭐? 하 씨.."
대표는 갑자기 짜증을 확 내며 화이트보드를 지웠다.
나는 당황했다.
"너 여의도 있었대며? 근데 이런 것도 몰라?참나"
나는 겉으로는 멋적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화가났다.
'아니 그럴수도 있지...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나? 참나 내가 누군지 알고'
이 마음이 가득 차오르자, 더이상 대표의 강의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대표의 강의는 끝났다.
대표는 강의전후 달라진게 없었다. 똑같은 표정과 톤으로 내게 업무를 지시했다.
달라진 건 나였다.
무시 받은 것에 화가 났다.
화가 나자 시야가 좁아졌다. 전문용어로 눈에 뵈는게 없어졌다.
이제는 가르침을 받기 보다 회사의 부족함이 더 커보였다.
왠지 아무거나 시키는 것 같은 사장님과, 뭔가 체계가 없는 것 같은 회사를 보면서 마음은 이 회사에 대해서 한 걸음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음이 멀어지니 열심히 하려는 동기부여도 고갈되어 갔다.
속마음은 '여의도 직장인'에 머물고 있었다.
내 생각에 부적절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 같이 일하던 차장님도, 여기가 비전이 없다고 했고, 조만간 본인 회사를 차릴 것이라고 했다. 여기는 비전이 없다고 했다. 그래 그런 것 같았다. 이럴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회사를 다닌 지 한 달여 만에 사장님께 그만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별로 말리지 않으셨다. 역시 똑같은 표정에 똑같은 톤이었다. 그러나, 대화를 마치고는 이내 회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내에게 그만두었다고 얘기하자, 아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 회사 비즈니스의 한계를 운운하며 설명했다. 그러다가 왠지 설명이 많아지는 스스로의 모습이 싫어졌다. 빨리 취업하겠노라고 아내에게 재빨리 얘기하고, 자리를 저쪽방으로 옮겼다.
아내가 미간을 찌푸렸다는 건 뭔가 나오기 직전이다. 나를 향한 직언이 나오기 직전.
보통 내가 잘못을 했을때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아내의 미간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