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공고를 보던 중 눈에 띄는 직장을 발견했다.
3자간 무역을 하는 곳이었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원자재를 사서 중국에 파는 중계무역을 하는 회사였다. 멋지다고 생각하며, 그곳에 지원했다.
회사는 무려 여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 20명도 안되는 회사인데 회사가 여의도에 있다니. 그리고 건물 한 층을 다 쓰고 있었다. 뭔가 돈 잘 벌고 내실 있는 회사 같았다. 사실, 바로 그렇게 보이려고 회사들이 비싼 곳에 자리잡기도 한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
이 회사의 영업에는 5명 정도 있었고, 각각 1명씩 국가를 맡고 있었다. 나와 다른 4명은 재무와 관리를 담당했다. 회사는 홍콩이 본사였고 한국은 해외법인이었다. 다만 홍콩은 거의 페이퍼컴퍼니 수준이었고, 거기에는 관리인력 1~2명 정도 있었다. 무역 관련 금융을 일으키기에 회사가 홍콩에 있어야 업무적으로 혜택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홍콩을 본사로 정한 것이었다. 무역 관련 거래 기록이 쌓일수록 한국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LC(신용장)를 끊기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회사는 참 흥미로웠다. 뭔가 니치마켓에서 자리를 잡은 모양새였다. 사무실내 천장에는 TV가 달려있었고 블룸버그 뉴스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멋있었다. 이쪽저쪽에서 영어로, 중국어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활기찼다. 그리고 호주에는 주재원도 있었다. 아니 회사가 10명인데 주재원이라니. 웬지 내 차례도 곧 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퇴근하면 아내에게 있었던 일들을 신나서 얘기해 주었다. 물론 아내에게 열렬한 반응은 없었다. 아내는 그냥 덤덤히 들으며 빨래를 개면서 가끔씩 미소를 지었다. '아 그래?' 하며 가끔씩 맞장구를 해주었다. 벌써 두 번이나 퇴사한 나 혼자만 달아올라있었다.
빨리 배워서 슈퍼루키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인정받아 주재원으로 나갈 생각에 이미 마음은 출국 준비를 마쳤다.
어느날 사건이 일어났다. 회사를 다닌 지 두 달이 채 안되었을 때였다.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데, 어디선가 F**** 단어가 난무하는 영어 대화를 듣게 되었다. 처음엔 TV인 줄 알고 천장을 쳐다봤는데, 아니었다. 아, 원래 블룸버그 TV는 사무실에서 무음으로 틀어놓는다. 뒤를 돌아보니, 팀장님이 수화기에 대고 영어로 F*** 단어로 마구 욕하며 영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회사가 점점 숙연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회사는 작년에 FX로 크게 돈을 벌었다. 방향성에 베팅해서 선물환 거래를 했는데 그게 맞아 떨어져서 대박이 났던 것이다. 돈을 크게 벌었다. 그래서 이 회사는 올해에도 선물환 거래를 했다. 그런데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 이게 방향이 완전히 반대로 된 것이다. 또, 규모나 상승폭도 작년보다 훨씬 커서 어마어마한 손실이 거의 확정된 것이다. 만기일이 다가오자 팀장은 어제 은행 담당자에게 청산을 요청했다.
손실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늦은 시간에 요청해서 그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늘에서야 청산하게 되었는데 어제보다 훨씬 큰 폭으로 FX가 움직여서 손실 폭이 훨씬 늘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F***단어가 난무하며, 팀장은 막무가내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사실 FX로 돈을 지속적으로 벌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24시간 열리는 FX시장에는 금리는 물론 유동성, 각 나라의 정세 등 다양한 요소들이 FX에 영향을 끼친다. FX를 가장 많이 다루는 환은행의 주 사업이 방향성 베팅이 아니라 외화를 매입하거나 매도할 때 붙이는 수수료 비즈니스라는 점은 분명히 시사점이 있었다.
Easy come Easy go라는 말처럼, 쉽게 왔던 돈들이 또 쉽게 빠져나갔다. 더 많이.
팀장님이 수화기로 욕하며 얘기하던 액수를 들어보니, 금액이 너무 컸다. 해외법인과 홍콩 본사의 보유 현금을 훌쩍 넘는 액수였다. 금액을 지급하지 못하면 회사는 파산신청을 해야 했다.
이게 무슨 영화같은 일인가.
한숨이 나왔다. 들어온 지 두 달도 안되었는데, 회사가 망하게 생겼다. 황당했고, 당황했다. 오늘 부모님한테 이직했다는 얘기를 해볼까 했는데, 미리 알게 되어 차라리 다행인가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아직 첫번째 직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계신다.
직원들은 수군거렸다.
- 이게 무슨 일이냐.
- 회사가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냐. 구멍가게도 아니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5초간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아까 F*** 단어를 들었을 때 현실감이 없긴 했다. 찰지게 영어로 욕하는 팀장님이 부럽기도 했고, 그 장면만 생각하면 영화 같기도 했다.
설거지를 잠시 멈춘 아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좀 신기하다 여보"
"응"
"그럼 이제 직장을 또 알아봐야겠네"
"응, 이번엔 좀 잘 알아볼게"
"그래 조금 규모 있는 대로 알아봐. 너무 홀랑홀랑 가지 말고"
아내가 다시 물을 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홀랑홀랑이란 단어가 거슬렸다.
그러나 참았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걱정 마, 여보. 내가 아직 젊잖아. 두 달밖에 안 다녔으니까. 이거 경력에 안 넣고 지원하면 돼. 어떻게 보면 잘된 거잖아 그렇지? 어차피 오래 못 다닐 회사 빨리 망한 거니까"
아내가 다시 설거지를 멈추고, 뭔가 말하려고 뒤를 돌아봤다.
"아 그럼 빨리 입사지원 시작해야겠다"
나는 지원서를 쓰겠다고 말하며, 달아났다.
마음이 다시 급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