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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칠 May 15. 2022

대체불가능한 김치볶음밥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이번 달에 NFT로 천만 원을 벌었다고 했다. NFT(Non-fungible token). 대체불가능 토큰. 친구는 NFT 설명에 열을 올렸다. NFT는 일종의 진품 인증서로, 무한히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그래픽을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준단다. 작가 사인이 들어간 초판본이 세상에 딱 하나 있다면 부르는 게 값이듯이 NFT는 그 고유성 때문에 가치가 생기고, 가치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쏠리므로 값이 오른다. 전형적인 ‘떡상’의 메커니즘이다. 누군가 ‘떡상’으로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돌면 더 큰 돈이 몰린다. 진품 인증서를 발행하는 기술 덕분에 새로운 투자 시장이 열린 것이다. “주식은 감질나고, 코인은 끝물이야. 이젠 NFT야.” 친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긴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천만 원을 벌었다니 의기양양할만 하다. 천만 원이 어떤 돈인가. 한 달에 천만 원은 일종의 구호이자 자격이다. 친구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강의도 찍고 책도 쓸 수 있을 것이다. <NFT로 한 달에 천만 원 버는 법>. 뭐 이런 제목으로. 아닌 게 아니라, 요즘엔 월에 천만 원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어쩌면 어딘가에 ‘월천 클럽’이라는 사교클럽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칵테일과 까나페가 놓인 쟁반을 든 웨이터가 돌아다니겠지. 초콜릿 분수대가 놓인 커다란 홀에서 클럽원들은 자기가 쓴 전자책의 pdf 파일(아마도 전자책으로 돈 버는 법에 대한 전자책)을 주고받을 것이다. 새 nft 구매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디스코드 방의 주소(우리 커뮤니티에 기여하세요)를 공유하거나.



친구는 내게도 nft를 권했다. “이젠 근로소득은 의미가 없다니까. 너도 늦기 전에 탑승해.” 어딘가에 올라타야 한다는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빌어먹을 전세계적 양적완화의 영향이다. 하지만 나는 월에 이백이 조금 안되는 돈을 겨우겨우 번다. 먹고 자기만 해도 한 푼도 안 남는데 시드머니는 꿈도 못 꾼다. ‘양적완화’나 ‘유동성 증가’보다는 ‘심화되는 불평등’이 내겐 훨씬 와닿는 개념이다. 월말에 친구와 약속이 생기면 저금통 계좌에 옮겨뒀던 돈을 체크카드 계좌로 다시 옮기는 것도 유동성이라면 유동성일까.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댄가. 주식 계좌수가 삼천만 개가 넘는 시대다. 투자할 돈이 없는 이도 인간관계를 위해선 투자 이야기를 할 줄 알아야 하는 법.  나는 이 시대를 살아내는 전략으로 내 나름의 투자 거절 대처법을 개발해뒀다. 내 대처법은 일종의 신포도 전략으로, 돈보단 나만의 가치를 쫓는 고독한 예술가인척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체계 내에서 성공할 수 없다면 나름의 가치체계를 창조한 다음 그리로 도망가는 것도 꽤 괜찮은 전략이다.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그거 들여다볼 시간에 그냥 책이나 한 장 더 볼래” “아니 투자하라는 게 아니라, 너 그림 그리잖아. 그거 NFT로 만들어서 팔아보라니까”



아이고,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사실 나는 그림을 종종 그린다. 전공을 했다거나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그린다. 굳이 굳이 그림 그리는 이유를 찾자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빈 공간을 채우면 기분이 좋다. 무엇이 비어있나? 일단 그림을 그리는 종이가 비어있고, 통장이 비어있다. 무엇보다도, 한때 구원의 희망이 놓여있던 자리가 이젠 비어있다. 내가 잘 될 거라는 희망. 무언가 근사한 일을 해낼 거라는 희망. 걱정 없이 전 세계를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내 집을 가질 거라는 희망…출근과 퇴근이 반복되는 쳇바퀴가 굴러가면 굴러갈수록 내 마음의 구멍은 점점 지름을 넓힌다. 그 자리에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린 김에 인스타에 올리기도 한다. 해시태그는 달지 않는다. 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볼 만큼 대단한 실력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조금 더 잘 그리게 된다면, 봐주길 바라면서도 보여주기 싫은 이런 이중적인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nft라니. 해시태그 달 배짱도 없는데 대뜸 시장에 상품으로 만들어서 내놓으라니.



“그냥 해봐. 너 그거 아냐. 인도에서 어떤 대학생이 자기 셀카 올렸는데 그게 몇천만 원에 팔린 거. 혹시 모른다니까”  누군가가 일확천금을 거머쥐었다는 얘기의 파급력은 이제 전 지구적이다.  “나는 니 그림이 좋아. 개성 있어. 대체 불가능하단 게 별거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개성 있는 사람은 드물잖아” 그래도 친구가 내 그림을 보고는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약간 고무됐다. 게다가 개성이라니. 어쩌면 친구는 NFT를 매일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미학을 정립해낸 것인지도 모른다. “봐봐, 여기 팔리는 것들 봐봐. 니 그림 스타일이랑 완전 비슷해.” 하지만 친구가 보여준 nft들은 내가 그린 그림들과 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너무 달라서 내가 그린 그림을 한 장이라도 봤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개성’을 말하면서 팔리는 그림과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다. 개성 있는 동시에 어느 스타일에 속할 수 있는가. 이건 마치 ‘둥근 세모’같은 형용모순이 아닌가.



하기야 이런 종류의 형용모순은 이미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지속가능한-발전’, ‘혁신적인-공공기관’ ‘진정성있는-마케팅’ 같은 단어들 말이다. <a인 b>의 구조를 띄고 있는 이런 구호들은,  b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이 a를 배반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속가능한 발전? 발전을 하려면 자원을 갈아 넣어야 하는데?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말이 발명된지도 30년이 넘었지만 같은 기간 동안 사라진 아마존 밀림의 넓이는 한국 면적의 8배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우리 세대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은은한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다. 혁신적인 공공기관? 공공기관은 근본적으로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분배하는 곳이 아닌가. 제도 개선이야 할 수 있겠지만 혁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솔직히 좀 오바다. 진정성 있는 마케팅? 마케팅의 본질은 단점을 축소시키고 장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진정성 있는 마케팅’보단 ‘진정성을 소구점으로 잡는 마케팅’이 더 적확한 구호 아닐까. 장점이 진정성이라면 단점은 뭘까?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



이처럼 개념상 불가능한 수식어인 a는, b에 내재된 문제점들을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상상 속에서 무마시킨다. 그 결과 개념은 오염되고 현실의 문제들은 점점 더 심화된다. 소리 없는 아우성 같은 이른바 ‘시적 허용’은, 시에서만 허용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세상은 이미 충분히 알쏭달쏭하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무슨 사회 비평을 하려고 한 건 아니다. 단지 친구의  ‘개성 있는 스타일’이라는 모순적인 말이, 또 내 그림과 전혀 닮지 않은 NFT 스타일의 그래픽들이 어쩌면 대체불가능 토큰이 사실은 대체가능하다는 고백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게 됐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이지 대체불가능 토큰은 얼마든지 대체가능하다. '떡상'만 할 수 있다면, 인도 대학생의 셀카든 코리아 백수의 셀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내 말은, NFT는 돈만 딸 수 있다면 무엇에 걸든 상관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하기가 부끄러워서 예술과 신기술의 아우라를 조금씩 빌려와 지은 최신식 파칭코가 아니냔 말이다.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니다. 누구 피해 입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냥 심통이 났을 뿐이다. 그래, 나는 정말이지 심통이 난다. 친구가 돈을 많이 번 게 배 아파서인지, 아니면 내 그림을 제대로 알아봐 주지 않아서인지, 대체불가능하지도 않으면서 대체불가능하다고 하는 NFT라는 개념이 기만적이라고 느껴서인지, 그냥 성격이 글러먹은 탓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심통이 난다.



나는 차라리 친구의 입에서 “니 그림은 전문성도 예술성도 없는 쓰레기야”라는 말을 듣고 싶다. 그거야말로 타당한 평가이고, 타당한 평가를 해준다는 것은 내 그림을 주의 깊게 봤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심통 난 내가 말한다. “나는 NFT 안 해. 나중에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게 되면 그림책이나 한 권 만들래” 천만 원을 번 친구가 답한다. “너 진짜 예술가가 됐구나” 이런, 고집을 부릴수록 예술가처럼 보이게 되는 효과도 마음에 안 든다. “아니야. 난 그냥 돈 없고 귀찮은 거야”



친구가 밥값을 냈다. “내가 자랑하려고 얘기한 게 아니라, 같이 벌었으면 좋겠어서 그래. 해봐. 근로소득 의미 없는 거 너도 알잖아” 밥을 얻어먹고 나니까 심통이 가라앉는다. 친구 말이 맞다. 나는 인심이 나올 곳간이 없어서 온갖 일에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만 많고 움직이긴 귀찮아서 그림이라는 도피처를 마련해 둔 건지도 모른다.



친구랑 가로등 아래를 걷는다. 우리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그림자는 몸 하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꼴이다. 퇴근 후 투자하는 친구와 창작하는 나. 우리의 본질은 같다. 같은 욕망의 몸체를 공유하는 샴쌍둥이다. 욕망의 이름은 생존, 혹은 한탕. 어차피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라는 것은 결국엔 일확천금을 의미하지 않나. 팔지 않겠다는 고집은 순수의 추구가 아니라 순수를 연기하는 심통이거나 허영이지 않나. 어쩌면 대놓고 한탕을 노린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가 획득할 수 있는 최선의 정직이다. 기만의 베일을 걷어내고 보면 우리는 모두 속물이다.



그러나 누가 속물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누가 한탕의 가능성에 걸지 않고서도 희망을 찾아낼 수 있나. NFT를 가능케한 블록체인이란 기술의 특성은 탈중앙화라고 한다. 탈중앙화란 곧 탈 시스템이다. 헌데 굳이 블록체인이 아니더라도 이미 모든 시스템은 낡았다. 믿을만한 전문가가 없다. 믿을만한 정치인이 없다. 믿을만한 미디어가 없다. 믿을만한 지식이 없다. 믿을 만한 삶의 모델이 없다. 정치인은 시민이 아니라 타겟을 대상으로 마케팅 감각을 발휘하고, 인간성은 리스크관리부서에서 다뤄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모든 경계가 흐물흐물하다. 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도 흐물흐물하다지 않는가. 이제 모든 순간은 도려내어져 데이터 또는 콘텐츠가 된다. 현대의 사금은 강이 아니라 시간에서 채굴된다. 일상과 콘텐츠의 벽이, 취향과 데이터의 벽이 사라지는 판국에 마땅히 품음직한 소박한 욕망과 허영의 경계가 남아 있을리가. 하늘 아래 속물이 아닌 자 있거든 나와보라.



“조만간 또 보자.” 친구가 택시를 탔다. 사실 그는 열심히 사는 참 좋은 친구다. 모두가 열심히다. 너무 열심힌데도 생존을 보장받지 못하므로, 누구도 열심을 비난할 수 없다. 그래서 나처럼 열심히 사는 게 영 적성에 안 맞는 사람도 별수 없이 열심히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한다. 점점 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돈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친구일 것이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선 애인에게 갔다. 애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닌, 온 우주를 통틀어도 고유한 자. 따지고 보면 애인이란 인간 NFT다. 하지만 나는 NFT보다 애인이란 말이 좋다. 사랑이란 말이 좋다. 사랑의 은밀한 속성이 좋다. 함께 불을 끄고 누워 어둠을 불러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함께 흘려보내는 느낌이 좋다. 함께 이불을 뒤집어 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 세상에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흐트러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 이불 속에서도 경계는 흐트러진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살과 살의 경계가.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혁신이라고 부르지만 이 어둠은 혁신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다. 외려 시간이 흐르기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것이다. 모든 예술은 이 어둠의 그림자다. 어둠 안에서 매 순간은 굳이 NFT화 하지 않아도 이미 고유하다. 지금의 1초가 좀 전의 1초와 다르고 그것들은 죄다 대체불가능하다. 거래 또한 불가능하므로 여기서 우리는 채집하지 않는 사치를 마음껏 누린다. 복에 겨운 영원은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어둠의 온기를 더듬어 읽는 동안엔 결코 훼손되지 않는다. 다음 페이지로 아침이 찾아오면 커튼을 걷고 이를 닦으며 현실에 접속해야 하긴 하지만.



애인은 출근을 한다. 나는 쉬는 날이다. 애인의 방에서 조금 더 빈둥대다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갈 참이다. 애인은 출근하기 전에 내게 만 원을 준다. “이따 맛있는 거 사먹구 가” 오랜만에 만져보는 현금의 감촉이다. 인간의 지문으로 닳고 닳은 종이. 제 겉에 적힌 숫자만큼의 가치를 해내는 정직한 물성이 반갑다. 세상의 모든 만 원과 별 문제 없이 대체될 수 없는 평범한 만 원이지만 대체하고픈 맘이 들지 않는다. 대신 낡은 지폐를 지갑 속에 갖고 다니는 오래된 이야기의 미학을 떠올린다. 대체가능한 것에 어느 순간의 의미를 더하면 대체불가능한 상징이 된다.



그 때, 위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만원을 NFT로 만들자! 무명의, 데뷔하지 않은 예술가에게 그의 애인이 밥 먹으라고 준 만 원을 NFT로 만들어 경매에 붙인다면? 노스탤지어, 낭만주의, 현대 문명에 대한 조롱을 두루 갖춘 이 작품에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다. 그래, NFT경매 현장을 라이브 커머스로 중계해도 좋을 것이다. 천문학적인 금액에 NFT가 낙찰되는 순간 나는 아파트를 살 부를 거머쥐는 대신 경매장을 달려서 도망 치리라. 외투는 자리에 내버려 두고 무대를 달려내려가야지. 펜스가 있다면 울타리를 넘는 사슴처럼 훌쩍 뛰어넘고. 관중들은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다. 나는 그대로 경매장을 뛰쳐나가 그 앞에 있는 김밥천국에 들어가서, 김치볶음밥(7000원)과 참치김밥(3000원)을 시킨 다음, 역사상 가장 비싼 만 원이 될 뻔했던 그 만 원을 꺼내 값을 치를 것이다. 값을 치르고 나면 NFT는 삭제해야지. 뒤늦게 도착한 기자들은 내가 김치볶음밥을 뒤적거리며 계란 프라이 노른자를 터트리는 모습이나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합당한 처사다. 그 만 원은 애인이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준 돈이기 때문이다.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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