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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칠 May 15. 2022

분갈이 몸살


1


분갈이 몸살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화분으로 옮겨진 식물이 시들시들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심하면 죽기도 한다.




2


 어렸을 적, 처음 전학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새 동네에 큰 탈 없이 적응을 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전에 정을 붙였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흐려지는 감정은 좀 이상했다. 당시엔 이상하다는 말을 더 뾰족하게 깎아낼 만큼 어휘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냥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 뒤, 이별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겪고 난 후였다. 사랑이 부패할 수도 있음을, 없으면 죽을 것 같던 이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어떤 시절은 끝난다. 그 시절의 마침표를 성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훼손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 시절이 끝나면 더 이상 스스로를 마냥 좋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성장, 혹은 훼손의 대가로 더 이상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게 된 이들은 방심하는 순간 시간을 흘리게 된다. 멍을 때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잠들지 못하며. 한때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착한 사람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외면하며, 쏟아져 밀려오는 의심스러운 현재를 겨우겨우 받아내고, 받아들자마자 집어던진다.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감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과거를 다루는 데 실패하며 몸과 마음을 축내고 있다. 모두가 사랑에 싫증 내며 싫증 낸 자신을 싫어하며 현재와 과거의 자신을 번갈아가며 죽이고 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죽이고 때로는 후회하며 현재를 죽인다. 이별이 겨누는 표적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나 변화는 필연이다. 사랑했던 과거는 반드시 사라진다. 새롭게 찾아온 현재는 언제나 낯설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적응은 최고의 덕목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선 현재에 적응해야 한다. 한곳에 머무르기 어려운 시대인 요즘에 새로운 것을 쉬이 사랑하는 습관은 덕목을 넘어 연마해야 할 재능이 되었다. 그러나 당장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은 너무 비정하지 않나. 정말로 사랑했던 과거라면, 그 시절을 애도할 만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식물이 분갈이 몸살을 앓듯이, 우리에게도 영원히 사라진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는 의례가 필요하지 않을까.






3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시작한 이유는, 내가 얼마 전부터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사도 했다. 밥벌이하는 환경에 맞춰 몸을 갈아치운다는 점에서 인간은 소라게와 닮았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간과 소라게 사이의 크기차이가 무의미할만큼 커다란 존재를 상상해보자. 그는 어쩌면 인간과 소라게를 같은 종으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라게는 이전에 살던 껍데기를 그리워할까? 아니면 그리움은 생존에 방해가 되는 감정이므로 새 껍데기를 구하는 순간 과거의 자신을 깔끔히 부정해버릴까? 사실 이런것들은 죄다 부질없는 망상이다. 인간과 소라게는 다르다. 소라게는 더 작은 껍데기로 찾아들어가지 않으니까.




나의 새로운 집은 원룸촌의 건물들이 대게 그렇듯이,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참 많다. 4층인데 실제론 3층이다. 언덕배기 위에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건물인 탓이다. 이전에 살던 집보다 평수가 무려 4평이나 줄었다. 거주자용 현관을 통과하면 바로 2층이 나온다. 1층은 주거공간이 아니다. 셀프세차장이다. 가끔 새벽에 벽이 울린다. 누군가 세차를 하러 온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잠에서 깨어 새벽 3시에 세차를 하러 오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를 상상한다.




사실 난 새벽잠을 자주 설치는 편이다. 날이 너무 춥지 않은 계절에 잠이 영 오지 않으면 공원을 찾아갔다. 잘 가꿔진 공원에 나가야만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이는 스스로의 생활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먹여살리기가 어려울 때, 공원은 무료이므로 언제든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것이 나의 비루한 취미였다. 다행히 이전 집 근처엔 공원, 카페, 책방, 산, 도서관이 모두 지척에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돈을 쓰지 않고 삶의 기쁨을 찾아내는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그 기쁨에 중독되는 것이 너무나 안일한 현실 회피처럼 느껴져 싫었다.




하지만 지금, 세차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새벽에 만나게 되는 과거의 나는 좋게만 보인다. 삶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다. 불안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미화되어 너무나 대단해진 과거의 나. 이 녀석을 죽여야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침대를 사기로 했다. 바닥에서 거리를 두면 새벽에 세차하는 소리도 조금은 작게 들릴 테니까.






4


회사를 다니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그 덕에 침대가 오기로 한 날도 금세 찾아왔다. 배송기사에게 전화가 온다. 그는 내가 회의실에서 스스로 듣기에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동안에 집에 침대를 가져다 두겠다고 말한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모텔 키를 건네듯이 방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회의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보니 배송기사가 보낸 문자가 찍혀있다. 입금 바랍니다. 6만 6천 원. 내가 예상한 금액보다 3만 원이나 비싼 금액이었다.




“왜 6만 원이 넘죠. 인터넷엔 설치비 3만 3천 원이라고 나와있던데요”


“아 거기가 4층이라. 4층부턴 3만 원이 더 붙어서요.”


“저 기사님. 저희 집은 2층부터 시작해서 실제론 3층인데요”




배송기사는 완강했다. 문패에 4층이라고 적혀있으면 4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3층’이란 말은 조금의 설득력도 갖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실제보단 뭐라고 적혀있는 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회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서비스를 만들었는지 보단 주식 시장에 적혀있는 숫자로 평가받는다. 글-콘텐츠-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켰는지 보단 조회 수가 중요하다. 그래야 광고 지면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성격이 어떤지보단 MBTI가 더 중요하다. 때로는 MBTI에 성격을 끼워 맞추며 정체성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상하다, 난 J인데, 왜 이럴 땐 P 같지?’ 대충 통화를 끊고 기사에게 6만 6천 원을 보냈다.




회사를 다시 다니려니 참 쉽지 않다. 그래도 팀원들은 다정해서 나의 시선이 신선하다는 말을 건네준다. 지금의 시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고맙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신선한 시각이라는 것은 결국엔 내 과거의 덕일 텐데, 나의 당면 목표는 현재에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 적응하는 것은 곧 과거를 죽이는 일이다. 과거를 죽이는 동시에 주머니까지 털어야 하니 참으로 어려운 미션이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신입답지 않으므로 일하는 내내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최소한 신입의 딱지가 붙어있는 동안엔 계속 시도해야 할 일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흐른다. 방심했더니 금세 지하철이 끊겼다. 강남이 처음인 나는 택시가 잡히지 않는단 말이 엄살인 줄로만 알았다. 한 시간을 도로 앞에 서 있다 그냥 모텔로 갔다. 택시를 잡겠다며 인도 가장자리에 까치발로 서있는 사람들이 위태로워 보인다. 실제로는 모텔이지만 간판은 호텔인 호텔에 갔다. 낮에 기사에게 보낸 돈과 별 차이 나지 않는 돈을 방값으로 냈다. 벽을 뚫고 들려오는 교성을 들으며 잠을 청하다, 마침내 집이 조금 그리워졌다. 아직 누워보지 못한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나의 402호가.






5


호텔에선 이상한 꿈을 꿨다. 오랫동안 갖고 싶어 했던 커다란 붙박이 책장이 눈앞에 있었다. 벽을 가득 매운 책들은 모두 내가 몇 번이고 읽은 책이다. 그런데 어떤 책도 꺼내서 읽고 싶지가 않았다. 귀찮았다. 책 읽는 일이 이제는 내게 속한 행동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귀찮다 귀찮다 하는 동안 꿈은 끝났다. 아직도 깊은 밤이다. 이제는 다들 자는지 벽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담배 냄새가 밴 이불을 걷어내며 회사가 코앞이므로 평소보다 한 시간은 더 잘 수 있을 것이라고 되뇌었다. 아직 잘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몸이 가뿐하다. 비로소 요 며칠간 조금 앓았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이만하면 충분히 앓았다고 쳐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별수 없어 사는 거, 까짓것 좀 비정하면 어떠냐고 그야말로 비정한 생각을 하며 돌아눕자 소파 위에 대충 벗어둔 옷이 보인다. 널브러진 꼴이 꼭 분갈이 몸살을 앓느라 떨어진 이파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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