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공간은 가능성을 가진다. 어떤 하루는 그곳에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며, 어떤 삶에게 그 공간은 내일을 꿈꿀 뿌리가 된다. 아마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공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빨래건조대에 이불을 널어 텐트를 만들고 그 안에 기어들어가서 책을 읽었다. 글자들을 불러내면 내 텐트는 궁전이 되고 사무실이 되고 교실이 되었다. 가끔 빨래가 가득 밀린 날에는 책상 밑이 되기도 하고, 선심 쓰듯이 동생을 끼워준 날도 있었다. 내가 커서 더는 텐트 안에 앉을 수 없을 때 즈음에는 방이 생겼다.
우리 집은 사정 상 이사를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해에는 안방을 같이 쓰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쪽방이 내 방이 되고. 또 어떤 해에는 거실 한 구석이 내 방이 되기도 했다. 그 작은 집에서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22년을 보냈다. 그 시간동안 계속해서 나의 공간을 꿈꾸며 무엇을 집이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을 차곡차곡 적어왔다.
내가 생각하는 집은,
다녀올게 라고 말하고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곳
어제가 있고 내일이 있는 곳
네가 돌아와서 두고 간 양말
어디 있냐고 물을 수 있는 곳
숨 쉬는 것이 아프지 않은 곳
돌아오는 길이 신나는 곳
아끼는 이들을 데려다
밥을 가득 해먹이고 싶은 곳
사랑하는 당신에게 하루의 시작과
하루의 끝을 물을 수 있는 곳
누군가와 친해지면 그 사람이 사는 곳이 궁금해진다. 그 집이 어디 있고 얼마나 크고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있어 누군가의 집에 가는 것은 상대의 흔적을 읽는 일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에는 평소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 사람의 삶이 흔적으로 남는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당신의 사소한 습관까지도. 양념과 향신료의 개수를 보면 요리를 자주 해먹는지 알 수 있고, 책장을 읽으면 어떤 것을 공부하는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사람을 자주 부르는 집은 의자나 숟가락이 넉넉하고, 칫솔이 여럿인 집은 여러 사람의 밤을 맡아준다. 그런 아주 작은 흔적들이 모여서 사람이 된다.
H의 자취방은 볕 좋은 곳에 작은 화분을 놓고 싶다던 꿈과 달리 구석에서 늘 곰팡이가 자라고, 해가 반도 들지 않는 창가에 끊임없이 발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모두가 걱정하던 그 집에서 H는 악착같이 살았다. 버텼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어느 비 많이 오는 여름에는 물이 가득 넘쳐서 짐이 푹 젖어버리고, 유독 춥던 어느 겨울에는 보일러가 터져서 목욕탕에 가서 간신히 씻고. H의 자취방은 우리 모두에게 현실은 이 모양 시궁창이라고 보여주는 것 같은 곳이었다. 오죽 집을 자주 고치러 갔으면 드라이버 세트를 생일선물로 사줄 정도로 엉망인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두 명이 눕기에도 모자란 그 퀴퀴한 방에 자주 모였다. 가서 카드게임을 하고, 방바닥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끝나버린 꿈과 두려운 설렘을 나눴다. 더는 서로의 안부를 자주 묻지 않게 되고, 마음이 뜸해졌을 때 즈음에 전화를 잘 안하는 H에게서 전화가 왔다.
정말 미안한데, 지금 만날 수 있어?
덜덜 떠는 H의 목소리를 듣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데리러 가겠다고 옷을 후다닥 주워 입고 사거리 횡단보도 건너에서 간만에 H를 맞이했을 때, 만나자마자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H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감이 왔다. H가 아주 일찍부터 자취를 하게 된 이유. 핏줄이라는 이름 아래에 도망칠 수 없던 폭력.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창밖의 두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 지금 바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며칠간의 끔찍한 두려움이 이어지고, 그 뒤로도 몇 번 그런 통화와 그런 자취방들이 반복되고.
그러던 끝에 H는 정말 먼 곳으로 떠났다.
또 그렇게 한참 서로가 살아있는지 확인만 간간히 해나가다가 H에게 메일을 받았다. 카톡도 아니고 메일이라니. 메일은 어플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놀러오라는 말과 함께 작은 집에서 웃고 있는 H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친구들과 파티를 한 것 같은 집 벽에는 My Sweet Home 이라 쓴 보드가 걸려있었다. 분명 H가 썼겠지. 특유의 대문자 필체를 보며 웃음이 났다. 아주 먼 땅에 가서, 끝내 발을 붙이고. 집을 구하고. 그 집이 마이 스윗 홈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내가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가슴 한 쪽의 저릿한 구석이 기분 좋게 설렜다. 생각해보면 H는 단 한 번도 자취방을 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언젠가 방바닥에 철푸덕 누워 죽은 벌레가 가득한 침침한 등을 보며 나도 자취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H는 피식 웃으며 야. 집에서 살아야지. 자취방 말고. 라고 대답했었다. H는 아마 방이 아닌 집을 찾아서 떠난 것이 아닐까. 안전하게 살아있는 공간. 집을 찾아서. 메일에 짧은 답장을 쓰며 H가 맛있는 것을 잔뜩 해먹고, 사랑하는 이들을 가득 초대하고. 밤이면 아프지 않은 꿈을 꾸며, 아침에는 큰 창 가득 쏟아지는 햇살에 눈부셔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하나 더 빌었다.
언젠가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