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친구가 카톡으로 늘 품속에 호떡 값을 넣고 다니는 사람의 사진과 함께 ‘내가 늘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라는 말을 보냈다. 보자마자 아차 나 사진 찍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본격적으로 봉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외출복 주머니에는 현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음식의 유혹에 매일 시달리기 때문이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군것질을 끊을 수 없는 사람이다. 군것질거리가 가득찬 시장이 있는 동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이 한몫한다고 변명해본다.
시장의 군것질거리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작은 돈으로 엄청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 아닐까. 똑같은 돈 3천원을 쓰더라도 매일 새로운 설계를 한다. 음.. 오늘은 떡볶이 1인분에 붕어빵은 집에 가져가자. 아니야. 호떡 하나 먹고 하나 싸가고 오뎅을 두 꼬치 먹을까. 굉장히 사소해보이지만 모든 간식은 행복해야하므로 그날의 상태에 따라 최선을 고르기 위해 노력한다. 겨울은 특히 거리에 나오는 점포가 늘어나면서 더욱 선택지가 많아진다. 잘 먹기 위해서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 많다. 타코야끼 아저씨가 오는 날, 늘 가던 가게에 새로 생긴 메뉴, 가격 인상, 현금이 없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가장 가까운 ATM까지. 이 모두를 꿰고 돈까지 챙겼다면? 나는 이제 무적이다. 출타할 때는 그날의 최고 한도 금액을 정하고, 그날의 상태를 점검한다. 날씨가 구질구질한 날은 따듯한 음식이 먹고 싶고, 앞선 식사가 부실한 날은 든든한 것을 먹어야한다. 그 외에도 바삭한 것을 씹고 싶은 날. 적당히 배에 기름칠 하고 싶은 날. 한없이 달콤한 것이 필요한 날이 전부 다르므로 세심하게 살핀다. 얼추 구상이 끝나면 이제 출발!
동네 시장 초입에는 떡볶이 집들이 모여 있다. 세상에 맛있는 떡볶이의 수는 떡볶이를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있을 것이다. 특히 내 입맛에 맞는 떡볶이를 고르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매운 것을 잘 먹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세상에서 나는 매운 음식이라고는 한입도 못 먹는 사람이니 얼마나 어려울까. 맵지 않으면서도 너무 달지 않아서 계속 먹을 수 있는 떡볶이. 게다가 쌀떡. 이런 희귀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떡볶이 집은 매우 찾기 힘드니 괜찮은 집이 있다면 제발 꾸준히 잘 되어서 문 닫지 않길 바랄 뿐이다. 우리 동네는 꼭 삼국지처럼 떡볶이 집이 세집 있는데, 한 집은 떡볶이를 잘하고 한 집은 튀김을, 다른 한 집은 순대를 잘한다. 그래서 떡튀순을 먹기로 작정한 날은 슬쩍슬쩍 눈치를 보면서 다 사와서 집에서 왕창 차려놓고 먹어야한다. 죄송하지만 어쩌겠는가.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을. 가끔 날씨가 우중충한 날에는 오뎅으로 도피하기도 한다. 각자의 오뎅에는 철학이 담겨있다.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국물을 낼 재료를 고르기 때문에 맛도, 깊이도 다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는 추운 날 오뎅 국물을 한 잔 마시며 그 안에 농축된 철학을 몸 안에 가득 받아들인다. 후, 따듯하다. 헤헤.
떡볶이처럼 든든한 것도 좋지만 바삭하고 빵빵한 것을 먹고 싶은 날도 있다. 그럴 때는 역시 붕어빵이지. 붕어빵과 잉어빵의 차이점을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매해 천원에 살 수 있는 붕어 마리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예전에는 천원에 붕어빵이 다섯 마리였다는 말을 꼭 고대 전설 전하듯이 말하며 내 차례가 오길 기다린다. 붕어빵은 어디서부터 먹는지, 슈크림인지 팥인지 각자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단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최대한 바삭한 곳부터. 그리고 팥으로다. 정석은 나름대로 정석인 이유가 있다. 기본이 늘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응용과 변주를 꿈꿀 수 있다. 그래서 가끔 팥 없이 슈크림이나 다른 맛만 있는 붕어빵집을 보면 화려하고 다채로워서 좋지만 뭔가 빼 놓은듯 한 느낌이 든다. 정석이란 그런 것이지. 붕어빵을 선택한 날에는 어김없이 선물을 하게 된다. 나 혼자서도 다 먹을 수 있지만 아직 식지 않은 봉투를 가슴에 품고 집에 갈 때의 그 기분이란! 내가 붕어빵 사왔어! 맛있는 것을 나눠먹고 싶은 기분은 누군가를 아끼는 기분이다. 같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 집에 있다 손님에게 붕어빵을 받으면 오는 내내 내 생각을 했구나 싶어서 고마운 마음에 씩 웃게 된다.
붕어빵보다 더 기름진 선택을 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호떡이지! 호떡은 기름에 거의 튀기듯 굽는 집도 있고 파사삭 부서지는 공갈호떡을 파는 집도 있는데 여기서는 기름에 눌러서 지져 굽는 호떡집을 골라본다. 호떡은 정말 겨울장사기 때문에 매번 파는 집이 조금씩 달라진다. 작년에 했던 집이 사라지기도 하고, 빈대떡 집에서 부업처럼 굽는 경우도 있고. 넓은 철판은 암묵적으로 새로 만든 것 놓는 자리, 좀 더 익히는 자리, 식은 것 데우는 자리로 나뉘어 돌아가게 된다. 주인 아줌마는 쉴 새 없이 새로 호떡을 만들어낸다. 반죽을 꺼내서 뚝 떼고. 일정량만큼 설탕과 견과를 넣은 뒤 잘 꼬집어 마무리한 부분부터 철판에 놓고 굽는 일. 적어도 이것만은 앞으로도 기계 아닌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얼마정도 눌러야 땅콩이 비집고 나와 터지지 않을지, 어떻게 꼬집어야 동그랗게 만들어질지 기계는 몰라도 주인 아줌마의 손은 정확히 알고 있다. 나의 재능도 어쩌면 호떡 만드는 일 같은 게 아닐까. 이름으로 부르기엔 애매하지만 분명 재능인 것.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의 하루를 좀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만들어 둔 호떡은 보온을 위해 작은 솥에 보관하는데, 그것도 바람이 너무 찬 날에는 끝내 딱딱하게 식어간다. 그럼 그 호떡은 못 파는 것이 되는데 사실 이 딱딱한 호떡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호떡이다. 혀가 데일까봐 아차 할 필요도 없고, 기름에 완전히 지져져서 바삭한 식감의 식은 호떡. 어른들 말씀하시길 진짜 맛있는 음식은 식어도 맛있는 것이랬다.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식은 호떡을 달라하시면 주인 아줌마의 표정이 재미있게 변한다. 아니 이런 것도 산단 말이야? 와 그래도 팔리다니 기쁘다! 의 표정. 어쩌면 나중에 내 재능을 살 사람도 이렇게 식은 호떡을 사는 나처럼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가슴 속에 작은 솥을 마련하고 잘 품어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꽤 괜찮은 재능이겠지 하고.
계절을 타지 않는 날에는 찹쌀도나스나 꽈배기를 고를 때도 있다. 이상하게 시장 도나스는 색이 꼭 갈색이어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TV에서 깨끗한 기름, 황금의 튀김 색을 광고하는데 갈색이어야 안심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누르면 기름이 슬쩍 베어 나오는 것을 뻔히 알고도 앙 먹었을 때. 그리고 뭍은 설탕을 쪽쪽 빨아먹으며 으으 달고 기름지군을 확인했을 때. 역시 이 맛이군 하고 피식 웃게 된다. 부담 없는 가격에 몇 개는 골라서 선물 하겠다 마음도 먹으며. 아마도 오랫동안 도나스 집은 ‘도나스’였을 것이고, 괜찮다면 앞으로도 그런 맛과 느낌일 것이다. 얼마 전 여러 사람이 모인 모임에서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주제로 이야기 했을 때. 다들 사랑, 정의, 행복 따위의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모임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우리 동네 부대찌개 맛이요. 라는 대답을 했다. 한 대 맞은 듯한 신선함이었다. 그래 맞아. 늘 거기서 그 맛이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그냥 있는 것으로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 내게는 이 모든 군것질거리들이 다 그렇다. 그러니 오늘도 지갑을 챙겨서 나간다.
오늘은 뭘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