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작 Feb 10. 2021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

캐롤라인 냅, <드링킹> ㅣ  

AA 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중지한다는 이야기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 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캐롤라인 냅, <드링킹> 



<오늘의 '박탈?'>


나는 (자랑이지만) 강의를 잘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크게 힘들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 물론 내가 나름 잘 아는 분야에 한정되는 이야기다. 현장의 감각이 날 깨우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주는 피드백이나 분위기를 받아 진행할 여유도 (지금은) 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나는 달랐다. 누군가 나를 주목할까 봐 엄청 겁내는 아이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책을 읽으라고 시켰다. 일어나서 읽는데 갑자기 조용한 교실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고,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고작 책 읽기로 이렇게 긴장한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커질수록 목소리는 더 떨렸다. 선생님이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 떨어? 나도 궁금했다. 나는 왜 이렇게 별거 아닌 일로 힘든지. 왜 이렇게 떨지.

그 이후로는 '그럴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몇 번 더 '그랬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대책은 역시나 (그때도) 책이었다. 멘토 같은 어른이나 선배도 없었고, 친구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배짱도 없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편집도 이상했고, 조금은 유치한 자기 주문으로 가득한 책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자기 주문이 절실했다.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리고 작은 성공을 위한 시도를 했다. 그 성공의 경험이 조금씩 쌓여서 자신감이 붙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본격적인 실험을 했다. (구체적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한 번 해보겠다)


물론 그 이후에도 나의 주저하고, 주목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은 그대로 있다. 그러나 내가 꼭 해야 할 경우, 필요한 경우는 그래도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나마 그런 어른이 된 것은 어린 시절 A에 머물던 내가, 회피하지 않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 한두 걸음 움직였던 덕이다.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A에서 B로 이동하기 위한 '힘겨운 인생 경험'이 있다. 이제는 안다. 앞에서 예로 든 '떨림' 정도는 사실상 애교다. 나이가 들수록 내가 가야 할 B가 두렵게 느껴지는 순간이 많다. 그 B에는 지금까지와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아픔과 상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알고 있다. 그걸 피하지 않고 버텨내는 게 중요하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방법은 없다.

그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회피하지 않고, 인격의 성장을 중지하지 않는 것. 그것뿐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紋章)을 갖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