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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0. 2021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주자.

원도, <아무튼, 언니> ㅣ


이 나라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운으로 치부한다. 남자를 잘못 만나서, 하필 그 길을 지나서, 왜 그 옷을 입어서, 여성들이 피해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치밀하게 짜 놓고도 피해 여성 개인의 운이나 노력만을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이에 대항하여 모든 여성이 억세게 운이 좋기를 바란다. 사회가 운을 따진다면, 여성들의 운이 겁나게 좋으면 해결될 일이다.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스러진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제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잘 먹고 잘 살며 운까지 좋을 차례가 아닌가. 지금껏 남성들은 운이 너무 좋았다. 자신에게 감정 이입하여 죄인이 되지 않도록 힘써줬던 사법기관 구성원을 만났고, 무조건적으로 관대한 각종 인사계 직원들이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남자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고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주는 그달만의 카르텔은 철옹성보다 단단했다. 이제는 여성들이 운이 좋을 차례다. 여성들의 운수 좋은 사회를 위해 나 또한 진심으로 노력할 것이다. 나를 억세게 운 좋은 동생으로 만들어준 언니들의 노력과 희생을 떠올리면서. 어디선가 홀로 울고 있을지 모를 동생들을 위해서라도.

완전히 돌아버려야만 똑바로 설 수 있는 팽이와 같은 세상에서 성실과 진심의 가치 따위, 씨알도 안 먹힐지 모른다. 이렇게 살아질 바엔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 쓰러지지 말자. 우리가 맞잡은 손이 끝없이 이어져 언젠가는 기쁨의 원을 그릴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주자. 세상이 심어준 혐오와 수치 대신 서로의 용기를 양분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갈 우리는 설렁탕을 먹지 않아도 충분히 운수 좋은 날을 맞이할 것이다.


-  원도, <아무튼, 언니>




<오늘의 '언니'>


방송국에는 언니들이 많았다. 가장 기억나는 언니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이나영)처럼 살아가는 언니였다. 멋있고, 귀엽고, 똑똑했다. 구성도 잘했고, 후배들에게도 잘했다. 아이디어가 넘쳤고, 프로그램도 잘 만들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사심 없이 대했다. 나도 그런 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많은 언니들은 그렇지 않았다. 자기 프로그램 챙기기 바빴고, 뒤에서 서브작가 험담도 많이 했다. 피디 앞에서 잘한 일은 자기 덕이고, 못한 건 서브작가를 앞세우기도 했다. 그런 언니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나저러나 나는 어떤 언니 노릇도 길게 하진 못했다. 결혼을 서른 살에 했는데, 방송국에서는 아주 일찍 한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아이를 바로 낳았다. 방송국에 언니는 많지만, '기혼 언니'는 많지 않았다. 구조상 거길 버티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언니>라는 제목을 보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의 나열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읽다 보니 달랐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맞았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를 제대로 쓸 때 가지는 힘은 그 어떤 것보다 컸다. 마치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처럼. 개인의 서사를 제대로 솔직히 밝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야기, 다른 글쓰기가 가능했다. 정말로,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아무튼, 언니>의 언니는 우리 사회에 알알이 흩어져 있는 여성들이 함께 손을 잡을 때, 연대를 할 때, 그 여성이 이 '운 나쁜 세상'에서 그나마 어떻게 살아갈 힘을 얻는지를 보여준다. 경찰관인 저자는 이런 거창한 '개념어' 따위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다만 시험공부를 할 때, 경찰 일을 할 때, 겪은 경험들을 그 시간을 함께 버텨주던 혹은 힘들게 했던 그 시절의 언니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는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 이야기까지 닿는다. 그렇게 술술 읽다 보면 전해진다. '연대'라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텨주는 힘이다.


방송국에는 결혼해서도 버티는 언니가 많지 않았다. 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불합리한 일에도 버티는 언니가 많지 않았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여전히 제자리다. 촘촘하게 불합리한 구조 속에 놓인 개인의 운에만 모든 것을 귀인 하는 구조. 그 구조에서 우리가 운 좋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운이 되어주어야 한다.' 버텨주어야 한다. 그런 언니가 되고 싶다고, 그런 언니를 만나고 싶다고.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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