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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0. 2021

이 일상을 정성 들여,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ㅣ


우리가 일상을 정성 들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는 곳이기에, 거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이 일상을 정성 들여,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눈을 감거나 귀를 막고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건 어쩌면 사막에 풀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아무 소용도 없고 결실을 맺게 될지 아닐지 모를 일. 그런다고 세상이 털끝 하나 달라질 것 같으냐는 소리 나 듣기 딱 좋은 일. 하지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 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글이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제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사라 아메드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정의 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며 망설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촘촘하게 차별로 연결된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촘촘하게 사유하고 망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


- 홍승은,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쓰는 사람'>




지난주부터 계속 새벽 2,3시까지 영상 수정을 하기 위해 하나하나 찬찬히 보고 있다. 30분짜리 영상 수정을 위해 하루 종일 본다. 몇 초에 한 번씩 자막을 넣고, 띄어쓰기를 보고, 어떤 화면이 좋을지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상의 주제라는 것이 갖가지 차별과 범죄(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같은 것이다. 수많은 세상의 악행들을 보다 보면 내가 당했던 수많은 상처들이 생각난다. 차별인지도 몰랐던, 수많은 것들. 아프다.



그래서 너무 지치면 책을 편다. 그러면 책이 토닥여준다. 한수희 작가의 책은 지금 두 번째다. 책 읽기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해서 다시 읽고 있다. 분명 읽은 글인데, 새롭다. 처음에 그었던 밑줄과 두 번째 긋는 밑줄들이 달라진다.



처음 내가 그은 부분은 여기다. '나도!'라고 기쁨의 메모도 했다.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사려 깊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밑줄은 여기다. '우리가 일상을 정성 들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열심히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런 세상에 나쁜 일이!'라고 외쳐도, 이 세상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은 안 달라져도 나는 달라진다. 이 영상을 만들며 생각한 건 단지 내가 받은 차별만이 아니다. 내가 행한 수많은 차별과 폭력들이다. 정상 가족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이성애자가 당연하다고 전제했던 나의 폭력적인 말들. 외모 평가를 아무렇게나 하고, 그걸 권력처럼 사용하는 일. 아이들에게 했던 통제들. 내가 가진 특권을 마치 나의 능력인 양 착각하고 내가 할 수 없던 많은 일들의 귀인을 가족에게서 찾는 일 등 수없이 많다. 이런 영상을 만들지 않았다면 몰랐을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반성하고 아주 조금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홍승은 작가가 인용한 말처럼 ' 정의를 위해 싸운다(기보다는 예방 교육을 만들고 있지만)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정의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라는 말을 새긴다. 망설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한수희와 홍승은 두 작가는 모두 '쓰는 일' , 그러니까 '사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쓴다는 행위가 가지는 이점은, 막연하게 잘 잡히지 않던 것을 명확하게 해주는 데 있는 것 같다. 두리뭉실 납작하게 일반화하지 않으려면 아주 자세히 보고, 생각하고, 곱씹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혹은 해왔던 일들의 틈새가 보인다. 새로운 발견처럼 알게 되는 것들도 많지만, 나의 어리석음이나 이중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는 일도 많다. 그래서 홍승은 작가의 말처럼 '글은 자신을 비추고, 나도 그것이 두렵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렇게 두렵게 만드는, 사려 깊게 만드는, 선량하게 만드는 글 쓰는 일이 참 좋다.


그렇다. 결국 처음 그은 밑줄로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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