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ㅣ
우리가 일상을 정성 들여, 바르게 살아간다고 해서 이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달라질 수 없는 곳이기에, 거꾸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이 일상을 정성 들여,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외부 세계에 눈을 감거나 귀를 막고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그건 어쩌면 사막에 풀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이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아무 소용도 없고 결실을 맺게 될지 아닐지 모를 일. 그런다고 세상이 털끝 하나 달라질 것 같으냐는 소리 나 듣기 딱 좋은 일. 하지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글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점이 나는 두렵다. 혼자 쓰고 읽는 일기와는 다르게 타인에게 글이 읽히면 내 한계가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드러나는 내 인식의 한계를 접할 때마다 멈칫하고, 내가 쉽게 타인의 고통을 글의 기폭제로 이용할까 봐 긴장한다. 때로 글은 삶을 쉽게 왜곡하고, 비틀고, 조롱하니까.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한계를 폭로하고 해제하는 글쓰기는 가능할까.
사라 아메드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정의 로우리라는 보장은 없다며 망설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촘촘하게 차별로 연결된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촘촘하게 사유하고 망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쓰는 사람으로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는 내 위치의 한계 알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대하려는 노력을 버리지 않기.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고통을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쓸 수 없는 말을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