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작 Nov 27. 2020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紋章)을 갖고 있다.

실뱅 테송,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ㅣ


빛과 파도 거품, 바람의 젖을 먹고 자란 늙은 젖먹이, 맹인 예술가의 영감을 이해하려면 그곳의 작은 섬에 머물러 봐야 한다. 장소의 정기가 인간을 기른다. 나는 우리 영혼에 지리의 링거가 꽂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두 풍경의 자식들이다.

(...)

  하늘의 빛,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 안개에 감싸인 섬들, 바다에 드리운 그림자들, 폭풍우. 거기서 나는 고대 문장(紋章)의 메아리를 감지했다.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紋章)을 갖고 있다. 그리스의 공간은 바림이 때리고, 빛이 관통하며, 의미심장한 발현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다.

- 실뱅 테송, <호메로스와 함께하는 여름>

<오늘의 문장(紋章)>



  나는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못한다. 그래서 더 두렵다. 남편이 언젠가 진지하게 물었다. "네 차가 큰 거 같니?" 내 차는 레이지만, 나도 모르게 나는 내 차의 사이즈를 '12인승 카니발'처럼 생각한다. 공간 지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주차는 늘 걱정이다. 불편한 건 괜찮지만, 다치거나 다치게 만드는 건 두렵다. 그래서 운전이 힘들다.


  그런 나지만, 내가 운전을 한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고 좋을 때가 있다. 그건 바로 도서관에 갈 때다. 도서관에 가면 이것저것 보고 싶은 책이 너무 많다. 남들이 반납한 책을 기웃거리고, 신간을 기웃거린다. 보고 싶은 책을 빌리면 그 옆에 다른 책을 또 빌린다. 그렇게 욕심내서 빌려도 정작 반도 못 읽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연체도 잘한다. 그래도 언제나 도서관에 들어서면 한두 끼쯤 굶고, (사실은 한 끼다. 난 한 끼만 굶어도 어지럽고 짜증이 난다) 분식집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다. 다 맛있어 보이고, 다 먹고 싶다.  

  게다가 난 교통이 안 좋은 오지에 산다. 만약 내가 운전을 못한다면 저 많은 책을 어찌 들고 온단 말인가! 이고 지고 오느라 무릎이 나가고(안 그래도 안 좋다) 딱딱한 어깨는 더 딱딱해질 것이다. 아니 무엇보다 귀찮아서 안 갈 것이다. 그러면서 근근이 버티겠지. 그러나 나는 차가 있고, 운전을 할 수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도서관은 내게 그런 '문장(紋章)'으로 각인되어 있다.


  며칠 전에 그런 마음으로 도서관에 갔다가. 갑자기 휑한 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에 그 앞에 계란 프라이가 올라간 짜파게티 사진이 아주 먹음직스럽게 걸려있었다. 아이와 함께 갔을 때, 아이는 그 사진을 보고,  수시로 침을 질질 흘리며 '짜파게티' 이야기를 했다. 결국 집에서 해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과자도 사 먹고, 커피도 먹었었다. 테이블 어딘가에는 늘 혼자 먹는  학생 혹은 중년이 있었다. 그들은 간단한 음식이나 도시락을 먹고 있었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여기 있지만, 여기 있고 싶지 않아 보였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 같은 '외로움'은 아니었다. 미래의 어딘가에 있을 그 무언가를 향해 현재를 아주 작게 접고, 접어 그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제 그 공간은 텅 비었다.  사람들이 마주 앉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미래를 위해 현재를 접고 있는 일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굳게 닫힌 문과 그 너머의 검고 텅 빈 공간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집어삼켰을까.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내게는 싫어하는 운전도 좋게 만드는 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어떤 이에게는 지독한 상처의 공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공간은 저마다의 문장(紋章)을 갖고 있다.'

   텅 빈 도서관 매점은 코로나 시대의 문장(紋章) 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왜냐하면 너는 영원히 모를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