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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1. 2021

책 읽기도 먹기도 좀 단정하게 하고 살려는 게 내 목표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ㅣ 


  (정은숙) 시를 쓰시는 게 아니라 시를 살고 계시잖아요.『아무 날이나 저녁때』시집에 "10년이 지난 메모를 발견하고" 같은 시구를 보면 평소 메모도 많이 하시는 듯하고 끊임없이 책을 읽고 계시잖아요. 그 메모가 시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 아닐까요? 

  (황인숙) 그건 메모 많이 하는 증거가 아니라  방 정리도 청소도 안 하고 사는 증거야. 10년 전 메모지가 내내 그 자리에 있다 발굴된 것. 메모는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뭐 떠오르는 게 있어야 메모를 하지. 그러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해. 기본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에너지를 전부 써버리고 살면 안 된대. 남겨놓고 살아야지 건강한 삶이고,  정돈된 삶이라는 거야. 내가 1년 내내 절대 못 지키는 캐치프레이즈가 '단아하게 살자'였거든. 그러지 못하니까 늘 탈진 상태에 있는 것 같아.

  책이야 걸어가면서도 읽어. 그런데 그게 어쩌면 나한테 독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그러니까 쓸 시간이 없이 읽는 거야. 그런데 독서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강박증이나 도피겠지. 그거랑 비슷한 패턴으로 나한테 나쁜 게 먹는 거거든.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양쪽 양식, 마음의 양식인 독서랑 먹는 거 그거를 내가 아무 제어를 못하고 브레이크 없이 하고 있어서 몸도 이 모양이고, 정신적으로도 그런 상태가 된 거지. 

  아무튼 삶에서 뭘 하고 싶어도 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뜻대로'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한테 달렸다는 뜻으로, 책 읽기도 먹기도 좀 단정하게 하고 살려는 게 내 목표인 거야.  

-  정은숙 인터뷰집, <스무 해의 폴짝> 

<오늘의 폴짝> 


  나에게 할아버지는 늘 엄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할아버지에게는 내가 어떤 존재였을까? 슬프게도,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첫 손녀도 아니었고, 손주도 아닌, 셋째 딸이었으니까.  대학을 서울로 오기 전까지 할아버지와 한 집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할아버지와는 별다르게 추억이나 좋은 기억이 없는 건 그래서겠지. 

  나와 삶의 동심원이 별다르게 겹치지 않는 할아버지였지만, 할아버지가 내게 한 말 중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이 있다. 어느 날, 식탁에서 할아버지는 나를 보고 말했다. "너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쪄. 그러니 마음껏 먹어."  할아버지는 키가 크고 여윈 편이었다. 평생 살이라고는 쪄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나보고 자신을 닮았다고 했다. 엄마도 아빠도 키가 크지 않은 편이었고, 엄마는 통통한 편이었다. 나는 평생 엄마랑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 역시 나도 할아버지 말처럼,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요즘 다시 할아버지의 그 말이 생각난다. 그리고 혼자 반박한다. "아니랍니다. 할아버지. 저는 몽실몽실 해지고 있어요." 

  요즘 나는 (임신 제외) 사상 최대의 몸무게를 찍고 있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잘 안 움직이고 많이 먹으니까._= (쓰면서도 부끄럽다.) 지금 생각하니 할아버지는 많이 안 드셨고, 계속 움직이셨다. 

  이건 단지 몸무게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혼은 신체에 깃든다. 신체가 있어야 영혼도 있고, 글도 있고, 삶도 단정해진다. 아, 나는 너무 게으른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주 작은 '폴짝'으로 동네를 약 3바퀴 돌고, 11층까지 걸어올라 왔다. 6층쯤에서 멈춰 서서 가슴을 활짝 열고 슈퍼맨 자세를 취하며 숨쉬기를 했다. 나는 건강하고 가볍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삶이 단정하고, 글을 다정하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다 말다 하겠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오늘 내가 '한다'라는 것이다. 게으른 삶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싶다.  


  <스무 해의 폴짝>은 마음산책의 정은숙 대표가 20인의 문인들을 만나 인터뷰한 책이다. 누구나 알만한 문인들로, 각자 나름의 맛이 있다. 그들이 쓴 글을 생각하며, <마음산책>에서 낸 책들을 생각하며, 휘리릭 읽었다. 작가들의 인터뷰는 항상 재미있다. 읽은 글은 그 이면을 볼 수 있고, 아직 못 읽은 글은 읽고 싶어 진다. 그래서 작가들의 인터뷰는 어떤 과정일 뿐 끝이 아니라 연결된다는 느낌이다. 

   산책로를 걷다가 일부러 숲길로 들어섰다. 수북 쌓인 낙엽을 밟고 싶어서다. 걷다 보니 황인숙 작가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어제 책을 읽을 때 작가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너털웃음이 들리고, (나는 작가를 모르지만) 눈을 반짝이고 소탈하게 웃는 얼굴이 그냥 그려졌다. 앞의 작가들의 인터뷰가 잘 정비된 길을 걷는 느낌이었다면, 황인숙 작가의 인터뷰는 자갈이 있는 오솔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의 오감은 낙엽이 소복이 쌓인 숲길을 걸으며 황인숙 작가의 글을 기억했다.  산책을 끝내고 집에 와서 황인숙 작가의 인터뷰 부분을 필사하며 다시 손끝으로 읽는다. 역시 좋다. 무엇보다 정은숙 대표에게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솔직하고 다정한 마음. 그 마음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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