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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1. 2021

기쁨은 단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도덕관임을

데이비드 브룩스, <두 번째 산> ㅣ 

대상을 잘 보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함의 어떤 행위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즉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나 자기가 바라는 것에서 온전히 빠져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보고자 하는 대상을 자기 관심사의 반영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잘 보는 것은 실체를 선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정서적 지식은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들처럼 습득해야 하는 것이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p386~387)

기쁨은 단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도덕관임을 깨닫게 된다.(p582) 

- 데이비드 브룩스, <두 번째 산> 



<오늘의 기쁨> 


  

앗! 띠지가 배 바지처럼. 왜 이렇게 위에 있지?

                                      

  우리 마을에 이사 온 것은 2014년이었다. 공동육아를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마을로 들어서던 때가 아직 생생하다. 긴 언덕의 끝에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솟아있는 아파트. 나는 이 외진 마을이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전세를 잡아 이사하고,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육아에 아이들을 보냈다. 그곳의 조합원들과 교류하며 생활했다. 낯선 곳에 이사 왔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러다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이 아픔을 어떻게 품어야 할지 몰라, 그저 마음만 허둥지둥할 때였다. 며칠 뒤 마을 입구 나무에 노란 리본이 한가득 달렸다. 마을의 누군가가 쓴 추모의 글도 세워져 있었다. 리본에도, 글에도 온기가 가득했다.  그때 난 깨달았다. 우리 마을은 고립된 곳이 아니구나.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곳이구나. 나는 마을 분들을 직접 알진 못했지만, 노란 리본이 가득 달린 나무가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벅찼다.


   그로부터 일 년 뒤인 2015년 1월, 갑자기 마을이 뒤숭숭해졌다.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산에 ‘시멘트 혼화제 연구소’가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몇몇 입주민 대표가 동의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착공계가 제출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몰랐다. 놀란 마을 주민들이 학교 시청각실로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우리가 사는 마을의 일이었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일이었다. 모두 함께 막아내자고 다짐했다. 곧이어 학교 바로 앞에 천막이 세워지고, 온라인에 밴드가 만들어졌다. 주민들은 시간표를 보고, 돌아가며 천막을 지켰다. 아침 시간은 일찍 일어나는 어르신들이 주로 맡고, 아이들이 등교하면 여유가 있는 젊은 엄마들이 낮 시간을 채웠다. 저녁에는 주로 건장한 남성들이 천막을 지켰다. 서로서로 섬처럼 살던 사람들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이 조금씩 포개어졌다. 학교 바로 앞 천막은 아이들에게도 천국이었다. 하교하면서 그곳에 들르면 맛있는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실질적으로 시간을 내서 지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갖가지 물품을 보냈기 때문이다. 투쟁은 힘겨웠지만 마을 공동체라는 새로운 장이 열렸다. 천막이라는 ‘환대의 공간’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그 공간은 얼마 뒤 '마을 도서관'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헌신적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낸, '두 번째 산'에 오른 이들이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분들이, 그 마음이, 내가 받은 그 기쁨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들은 앞장섰고, 우리 마을이 문화를 바꿨다. 그 결과, 지금 나는 나의 중요한 정체성 중의 하나로, '마을 주민'을 내세울 수 있는 어떤 관계망 속에서 생활하며, 아이들을 키워가고 있다. 브룩스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떤 사회의 문화가 바뀐다고 하더라도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달라지진 않지만 평균적인 행동은 바뀐'(p65)다. 그렇게 우리는 달라졌다.  





얼마 전에 나는 나의 이 마을 공동체 탄생기를 <도서관과 나>에 '지극히 평범한 주민 입장'에서 실었다.



   데이비드 브룩스가 이야기하는 '두 번째 산'에 오른 이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법'을 아는 이들이다. 그들에 의해 공동체는 복원되고, 시작된다. 그렇다고 이들은 단지, 공동체 활동가(?) 정도로 협소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삶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두 번째 산에 오른 이들은 '삶'이'혼자' 만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며, 이를 통해 '기쁨'을 느낄 수 없다는 걸 안다. '기쁨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도덕관임을 알기'(p582)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소한 것과 주위의 이들에게서 경이를 발견하고 진정한 삶의 기쁨을 느끼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이 넘치는 삶은 태도이며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사실, <두 번째 산>처럼 흔히 서구의 지식인(특히 기자)들이 교양서를 쓰는 방식 -인용과 우화로 가득한- 을 좋아하지 않는다. 간단한 말을 너무 늘인다는 느낌과 결과론으로 끼워 맞추기식의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면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 이상의 통찰은 분명히 있다. 직업, 결혼, 신앙, 공동체라는 구체적 챕터들에서 수많은 밑줄 긋기가 있었다.  대상은 달라도,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의 삶에서 '내가 누구일까?'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누구일까?'(p580)를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부생활의 위기가 왔을 때 궁극적인 해결책을 기대하지 말고, "우리 오후에 산책할까?""당신은 쉬어. 청소는 내가 할게"(p366)와 같은 실천 하라고 말한다. 


  삶에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는 스스로는 알고 있다. 문제는 이를 스스로 깨닫는 순간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깨달음의 순간과 관련해 까다롭고 어려운 점은, 이런 순간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런 순간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것이다."(p218) 



 * 추가 밑줄) 



헌신의 가장 완벽한 정의는 이렇다. "어떤 것과 사랑에 빠지며, 그런 다음 그 사랑이 흔들릴 때를 대비해 그 주위에 어떤 행위 구조를 구축하는 것." 


  (...) 풍성한 인생, 충만한 삶은 헌신과 의무로 정의된다. 잘 살아가는 인생은 자유로운 선택에서 달콤한 강제로 넘어가는 여정이다.(p148~149) 


  진정한 자유는 구속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구속을 찾는 것이다.(신학자 팀 켈러. 재인용) (p151) 


  도덕 형성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과 맺는 관계 차원의 문제이다. (p153)  


  결혼 생활을 별문제 없이 잘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각자 더 나은 사람으로 개선되는 것이다.(p351) 


  나는 대학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뉴매시스>를 읽을 수 있도록 개가식 서가를 마련해 주고, 또 당시에 내가 진심으로 증오하던 책을 읽도록 강요하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었던 시카고 대학교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학교는 인생을 바꿀 수 있다.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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