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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15. 2021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치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  김연수, <시절 일기> ㅣ 



일기의 본질이 쓰는 행위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은 스테파니 도우릭의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일기 쓰기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모든 글쓰기와 관련해서도 상당히 훌륭하다. 일기를 잘 쓰기 위한 지침 같은 건 이 책에 없다. 대신 이 책은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쓸 게 없다는 사실마저도 일기의 소재로 삼을 것을 권한다. 일기란 잘 쓰는 게 아니라 자주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수많은 조언 중 하나인 다음의 글을 보면, <카프카의 일기>에 나오는 '일러두기'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일기를 쓸 때 정말 중요한 요소는 열정, 감각, 진실함, 연민, 호기심, 통찰, 창의성, 자발성, 예술적 기교, 기쁨이다. 맞춤법이나 문법, 단정한 글씨, 어순, 시간 순서, 완성도 따위는 일기 쓰기에서 별로 중요치 않다. 

읽는 사람이 없을 것. 마음대로 쓸 것. 이 두 가지 지침 덕분에 일기 쓰기는 창의적 글쓰기에 가까워진다. 한 번이라도 발표를 목적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누군가 읽는다고 생각하며 한 글자도 쓰기가 싫어진다. 글쓰기가 괴로운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일기 쓰기를 권하고 싶다. 누구도 읽지 않을 테니 쓰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써라. 대신에 날마다 쓰고, 적어도 이십 분은 계속 써라. 다 쓰고 나면 찢어버려도 좋다.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치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이것이 바로 <일기, 나를 찾아가는 첫걸음>에 나오는 일기 쓰기 지침이다.  

(...)

소설가 D.H. 로렌스는 "사람이 두 번의 삶을 살 수 있다며 좋으련만. 첫 번째 삶에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두 번째 삶에서는 그 실수로부터 이득을 얻도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한 번의 삶으로는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는 뜻이겠다. 

(...)

그러나 도깨비도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두 번 이상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실수투성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영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메모 앱인 에버노트의 광고 카피는 'Second Brain'이다.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나 해야 할 일 등을 기억하려고 애쓰는 대신 에버노트에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기를 상품화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 광고 카피는 'Second Life'가 될 것이다. 캐서린 맨스필드가 말한 자기 이해란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한 번 더 살 수 있다.  

- 김연수, <시절 일기> 




<오늘의 'Second Life' > 




  작업하던 프로그램 대부분이 12월에 끝났다.  지금 남은 건 교육용 영상인데 수정 단계다. 바꿔야 할 부분을 제작사 쪽에 전달하면 영상을 다시 변경하는 형태다. 그래서 며칠 바쁘긴 하지만, 그걸 보내고 나면 또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도서관을 간다. 


   요즘에는 가급적 책을 덜 사려고 노력 중이다. 집에 책이 너무 쌓이는데, 잘 안 치우기 때문이다. 침대 앞뒤로 (책꽂이도 아닌데) 책을 막 쌓아놨더니, 남편이 자다가 책에 맞았다. 웃긴데 미안해서 급 반성을 하며, 책을 좀 정리했다. (책과 옷을 포함해 5박스를 아름다운 가게로 보냈다.) 장기적으로는  전자책을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 같은데, 어쩌겠는가. 아직은 종이책이 좋다. 가급적 책을 덜 사고 빌리는 방향으로 해보자고 혼자 다짐하고 있다. (그래도 살 책은 꼭 사야 한다. 그래야 좋은 책이 계속 출판되겠지.) 


  아무튼, 도서관을 갈 때마다 왜 이렇게 읽고 싶은 책이 많은 지, 욕심내서 막 빌려온다. 가족 4명의 카드를 내가 다 쓰고 도서관마다 두 당 7권(마지막 주 수요일은 무려 14권)을 빌릴 수 있으니, 부자 된 기분이다.  요즘 도서관은 코로나 체크 때문에 1층까지 엘리베이터를 운영 안 한다. 주차장에서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낑낑거리며, '과연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것인가?' 반문하기도 하지만, 일단 빌려 가보자며 무겁게 들고 온다.  아이들 책 반, 내 책 반이다. 



<지난주 빌린 책의 일부다. 예약 도서가 도착했다 알람이 와 오늘 또 갔다 왔다. 그리고 또 왕창 빌렸다. 도대체 언제 다 읽는 단 말인가!> 

  

시간도 많고, 보고 싶은 책도 많아 비교적 휘리릭 잘 읽힌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글에 속도가 붙으면 붙을수록 점점 더 시를 못 읽겠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 원래도 막 시를 좋아하고, 시적 감정이 풍부하고 이런 사람은 못 됐다. 근데 그게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랄까. 시는 잠잠히 앉아 고요히 젖어들어야 할 것 같은데.  번번이 문턱에서 걸려서 못 넘고 넘어지는 느낌이다.  


그런 차에 (가보진 못했다. 여러 지인들에게 많은 추천을 받고, 꼭 가봐야지 다짐만 작년부터 하고 있는)  용인의 서점, '생각을 담는 집'에서 시 필사를 함께 시작하는  프로그램을 한다는 공지를 봤다. 매일 시를 한 편씩 올려주시면, 그걸 필사하고 자기 생각도 살짝 적어 공유한다고 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시 필사를 해봐야지. 하고 혼자 며칠 쓰다가 그만둔 전적이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이런 '타율적 강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신청했고, 어제 (우여곡절 끝에) 노트 패키지를 받았다. 노트만 오는 줄 알았는데 다른 예쁜 것들도 가득해서 기대하지 않던 선물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소포가 오는 날,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 노트(와 다른 선물들). 2월부터 이 노트에 시를 한 편씩+_+>


물론, 이 행위를 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시적 감성이 아주 풍부하거나, 찰나를 영원처럼 느끼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시 필사'라는 행위를 (누군가와 서로를 독려하며) 계속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 중요한 건 쓰는 행위 자치이지, 남기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한 번 더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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