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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Feb 20. 2021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 백수린,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l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면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공짜 영화를 볼 수 있었나요?" 

  (...)

 "아니요. 그것도 그렇지만 모든 영화의 결말을 미리 본다는 점이었어요. 영화가 끝나면 문을 열고 손님들에게 출구를 안내해야 하니까 끝나기 직전 상영관 안에 먼저 둘 어가야 했거든요." 

 "결말을 미리 알면 나쁜 거 아니에요?"
  민주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 시절에는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한 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
  "...... 괜찮아지나요?"

  박 선생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민주의 책상 위에 차가 담긴 종이컵을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없어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 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오늘의 시차> 

   짧은 이야기 모음인 이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구부러진 시간 위에서 살아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겹쳐진 '오늘'. 수시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시차'를 경험한다. 그래서 모두가  오늘이라는 협소한 시간 위에 발을 올리고 있을지라도,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나도 그랬다. 아주 어릴 때는 지나 온 시간이 적어,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막연해 현재를 살았다. 시간은 팽팽한 선위로 흐르는 줄 알았다. 얼마 전에 10세 아들 역시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게임시간제한을 걸고 있다. 거의 같은 시간을 받지만 딸은 게임시간 부자다. 반면, 아들은 없다. 생기는 족족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누나가 "내일을 위해 게임시간을 아끼는 건 어때?"라고 하자, 아들은 말했다. "나는 그럴 수 없어. 나에게는 오늘이 중요하거든요. 왜 인지 알아? 내일은 다시 오늘이 될 거니까. 그럼 나는 오늘만 살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써야 해!"  아이에게 시간은 컨베이어 벨트 위와 같이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지나온 시간이 쌓이면서 나의 시간의 길은 구부려졌다. 본격적으로 이 현상이 가속화된 것은 아이를 낳고, 기르면 서다. 나는 '시차'를 수시로 경험했다. 나의 과거의 어느 순간이 불쑥 튀어나와, 나의 현재의 아이를 울리기도 했고. 오지도 않은 나의 아이의 미래가 충동구매로  이어졌다.(자본주의는 정말 놀랍도록 이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불안정한 인간인지, 해피엔딩을 갈구하는지 온몸으로 느꼈다.  

< 책 속에는 이런 그림들이 등장한다> 


  주인공들도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시차를 경험한다.  연인과 이별을 결심했던 남자는 말갛게 빛나는  어린 연인들의 말속에서 과거 자신의 사랑을 발견하고, 이별 선언 대신 사랑 고백을 한다. 옛 연인과 중국집에서 재회한 여자는 과거 어느 날, 그리고 다른 길을 갔었다면 자신이었을 시간 속을 왔다 갔다 한다. 어릴 적 같이 살았던 사촌 누나가 이유도 없이 찾아온 날, 벤치에 누나와 나란히 앉아 있던 남자는 누나 없는 미래로 갔다가 다시 온다. 그렇게 그들은 머무는 듯 유영하며 오늘을 살 듯 어제와 내일을 산다.  

  시간이 뒤섞이면, 시점이 변화한다. 다른 이의 시선 혹은 다른 위치에서 사람이나 사건을 볼 여유가 생긴다. 그렇게 오늘의 그가 달라진다. 

   글을 읽으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과거는 미로처럼 우리의 삶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다. 그 미로를 어떻게 통과할지, 어떻게 받아들인지는 결국 선택이다. 반면 미래는 어쩔 수 없다. 열심히 선택하고 노력해보지만, 우리는 늘 해피엔딩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선택 가능한 과거가 있다. 그러니 열심히 바닥에 떨어진 팝콘을 주우며, 다음 영화가 다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대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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