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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Jul 09. 2022

늘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어른

l 윤가은 『호호호』(ft. 영화 <우리집>)

 

어쩌면 아저씨는 정말로 내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하셨을지도 모른다. 충동적으로 도둑질을 저지른 나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평소와 똑같은 아저씨의 반응을 완전히 오해했던 걸지도. 하지만 내가 아저씨를 속이고 아저씨의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프고 괴로웠다. 그런데 만에 하나 아저씨가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알고도 눈감아 준 거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부끄러움이 내 안에 가득 차올랐다. 내가 제일 믿고 따르던 어른을 크게 실망시켰다는 자책감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이후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겨우 용기 내어 다시 아담 문방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때도 아저씨는 주저하며 눈치만 보던 나를 아주 반갑고 편안하게 맞아주셨다. 지나간 일은 이제 그만 잊으라는 듯. 앞으로 남은 시간들이 더 중요하다는 듯. 이후 나는 아무리 화가 나고 절박해져도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일은,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한편, 마음 깊이 안심하기도 했다.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도 다시 나를 예전처럼 믿어주고 늘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어른이 내게도 있었으니까.

-  윤가은 『호호호』 (마음산책, 2022)



<오늘의 '호호호'>


  <지식채널 e>가 처음 방송되었을 때, 내가 자주 하던 놀이가 있었다. 방송만 보고 담당 작가 맞히기였다. 당시에는 마지막 크레디트에 제작팀의 이름이 올라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열에 아홉은 명중이었다. 그 팀 작가들은 다 알았고, 거의 다 친했기 때문이다. 이건 별 쓸데없는 이야기지만 살짝 덧붙이면, 사실 처음에는 나도 <지식채널 e> 팀 소속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기회가 생겨 미디어 프로그램의 메인 작가가 되어서 빠지게 되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때 <지식채널 e>에 남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당시는 모두가 시작이었고, 미혼이었다. 시행착오도 다양한 아이디어도 넘쳐나도 시절이었다. 반짝이고 황당하던 아이템으로 가득하던 그 시간을 함께 했다면, 나에게도 프로그램에도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지식채널 e>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식채널 e>는 단단히 자리 잡았는데, 나는 아니었다. 금수에 가까운 아이 둘과 함께 엄청난 시행착오를 했다. 

  아무튼, 내가 맞히는 걸 옆에서 지켜보던 작가 언니가 나보고 신기하다고 했다. 나도 참 신기했다. 내가 잘 맞히는 게 신기한 게 아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그토록 작가들의 색이 진하게 나오는 게 신기했다.


  <지식채널 e>는 일반적인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아이템'이 있고, 그에 맞게 자료조사를 해서 구성을 한다. 그러나 <지식채널 e>는 다르다. 자기 관심 분야를 자기가 알아서 파서, 잘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무서울 정도로.


  윤가은 감독의 영화도 그렇다.


  6년 전,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다. 영화의 공기가 나를 1980년대 5학년의 어느 날로 데려갔다. 운동장에서 마지막까지 선택을 못 받았던 그날. 그 아픔이 소녀의 눈빛을 통해 30대의 나에게 다시 왔다. 그래 그거였다.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세계, 달콤하지만 또 그만큼 잔인한 '소녀의 세계'. 소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그 세계가 생생하게 살아서 내게 왔다.



자신들만의 재료로 '우리 집'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 (영화 <우리들> 속 장면)


  코로나로 한참 아플 때, 누워서 윤가은 감독의 『호호호』를 '호호호'거리며 읽었다. 다정한 이들이 보내준 마음과 함께 회복하는데 도움이 됐다. 몸이 좀 낫고 나서 영화 <우리집>을 보았다. <우리집>의 카메라 앵글을 따라가다 보니, 윤가은 감독의 '매직'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우리집>의 카메라 높이와 팔로우는 딱 아이들의 그것이다. 부부 싸움도 아이들에게 들리는 정도로 전해진다. 혼나는 것도, 버스를 잘못 탄 것도. 아이들이 듣고 보는 그대로 관객에게 전해진다.


  어른들은 이혼을 준비하고, 바람을 피우고, 집을 내놓고, 독일 주재 서류를 내는 그 '큰일들'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 안다. 아이들은 항상 '우리 집'안에 있고, '가족'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그 시선, 딱 그 높이에서 시종일관 영화는 흘러간다. 그래서 얼핏 개연성 없어 보이는 장면이 나와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다. 영화 <우리 집>에서 아이들은 지쳐서 해변을 걷게 된다. 해도 졌고, 배도 고프다. 그때 마침 눈앞에서 급하게 산통이 와서 텐트를 두고 떠나는 부부가 보인다. 그렇게 아이들 앞에는 먹을 것과 잠잘 곳이 주어진다. 주위에 다른 이는 아무도 없다. 아이들의 눈으로, 아이들의 행동반경 안에서는 고마운 '우리 집'이 마법처럼 생긴 것이다.


  나는 윤가은 감독의 영화가 생생하고 달콤한 소녀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카메라와 모든 상황( 윤가은 감독은 아이들에게 미리 대본을 주지 않고, 쪽지로 상황을 전달한다고 한다)은 철저히 아이들의 눈높이와 아이들의 상상력의 범위에 있다. 그래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해보려는'(<우리 집> '하나'의 대사)는 아이들의 행동과 생각과 눈빛과 대사는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배경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 바로 '한결같은 어른'이다. 어린 윤가은이 문방구에서 스티커 2장을 1장으로 속여 샀을 때, 이를 그저 묵묵히 봐줬던 그 어른.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질러도 다시 나를 예전처럼 믿어주고 늘 한결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어른'이 이제 윤가은 감독이 된 것이다.


영화 <우리집> 촬영 수칙



  윤가은 감독의 <우리집> 촬영 수칙을 보고 있자만,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모두가 저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는 촬영장이라면, 아이들은 본연의 것을 마음껏 드러낼 것이다. 예쁘게 포장하지 않고,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나의 그대로. 시시각각 일어나는 총천연색의 마음 그대로 말이다. 비단 영화 촬영장에서만 저런 것은 아닐 것이다. 집에서, 학교에서, 아이와 있는 모든 공간에서. 저런 마음과 태도로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들은 훨씬 더 자신답게 더 빛나게 자랄 것이다(일단, 우리 집부터... 먼저...).


  초기의 <지식채널 e>에서 작가들의 색이 그토록 선명하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 역시, 시청자들의 폭발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어떤 것을 해도 괜찮았던 시절이었다. 해보고 싶은 것을, 한 번 해보라고 인정받고 사랑받던 시절. 처음이니까. 서툴러도 괜찮았다. 의미 따위는 없어도 괜찮았다. 아니면 의미만 충만해도 괜찮았다. 어떤 것이든 해볼 수 있는 시절이었기에 그렇게 각자의 색을 마음껏 드러낸 것이다.


  윤가은 감독은 웬만하면 진심으로 많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호불호'가 아닌 '호호호'라고.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의 글과 영화는 참으로 '호호호'하다. 그 '호호호'의 마음이 읽는 내내 책에서도 전해져 좋았다. 촬영장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아이들이 그 '호호호'에 둘러싸여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호호호'해진다. 윤가은 감독의 글도 참 좋지만, 그래도 역시나 영화가 더 좋다. 다음 영화가 빨리 나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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