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만 하고 쓰지 못하는 당신에게, 오독을 권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과학 독후감 대회였다. 나른한 오후였고, 햇살이 가득 담긴 교실은 후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써 내려갔다. 교실은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로 가득했다. 내 연필만 빼고. 앞에 놓인 빈 원고지가 광활했다. 답답했다. 초조함에 목이 말랐다. 읽은 책을 떠올렸지만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미는 있었다. 그래서? 뭘 써야 한단 말인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엉덩이를 살짝 의자에 걸치고 흔들흔들 까닥까닥하며 글의 뮤즈가 오길(?) 기다렸다.
그 순간.
"앗!"
꽈당! 오라는 글의 뮤즈 대신 다른 게 왔다.
그렇다. 대차게 엉덩이로 수직 낙하해 버렸다. 아무 이유 없이 혼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은 것이다. 조용한 교실에 벼락처럼 쏟아진 울림이었다.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백배 더 무안했다. 옆자리 아이의 황당한 눈빛, 교실 한가득 울려 퍼지던 웃음을 타고 고통과 부끄러움이 한없이 밀려왔다.
그 이후 '독후감'은 바닥에 나뒹굴던 원고지와 연필 그리고 엉덩이에 느껴지던 고통의 메타포가 되었고, 트라우마가 생겨 그때부터 잘 안 썼다.... 거짓말이다. 그냥 안 썼다. 게을렀다. 오해했다. 독후감이라면 모름지기 줄거리를 요약하고, 교훈적인 느낌이나 새로 알게 된 것을 반드시 써야 ‘만’ 하는 줄 알았다. 그 틀을 채우는 행위 자체가 귀찮았다. 재미없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더 그랬다. 당연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고, 숙제도 안 내줬으니까. 그래도 책은 꾸준히 읽었다. 인생에는 질문이 가득한데, 책에는 정말, 답이 있으니까. 연애가 잘 풀리지 않으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었고, 누군가가 미워지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밑줄을 그었다(‘그래, 이 백 년도 못 사는 나약한 인간아. 너도나도 불쌍한 존재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풀렸다). 차별을 당한 것 같아 억울하면 정희진의 『우리 안의 페미니즘』을 펼쳤고, 집이 너무 더러우면 루스 수컵의 『정리가 필요한 인생』(그러나 여전히 ‘정리는 안 되는 인생’을 살고 있다)을 샀다. 아프거나 힘들거나 답답할 때, 나는 ‘단 한 문장’에 오래 머무르곤 했다. 그 문장이 나의 창이었다. 숨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아프면 아파서, 좋으면 좋아서, 재미있으면 재미있어서, 마음껏 오독했다.
‘반짝이던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나는 한 문장을 잡고 썼다
그렇게 읽은 책은 쌓여갔지만, 서평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날 설레게 하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지만, 그걸로 끝. 그냥 덮었다. 책만이 아니다. 영화와 공연 등을 보며 뭉클한 순간이 많았다. 한 장면에 담긴 ‘저 너머’의 이야기에 마음이 한없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냥 또 흘려보냈다. 무심하게 그렇게.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책장에 꽂힌 책이라는 걸. 분명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마음에 불이 켜졌었는데, 이토록 까맣게 잊다니. 대단한 무엇을 놓친 기분이었다. 다시 책을 펼쳤다. 밑줄과 메모 사이로 ‘그때의 반짝이던 시간’이 있었다.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오독’이 있었다.
책 안에는 수없이 많은 문장이 있다. 그중에서 나는 딱 ‘그 문장’에 감응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정하게 토닥였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줬다. 그것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와 책이 함께 만들어낸 일종의 마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마법을 그냥 날려버렸다. 12시가 지난 신데렐라처럼 책을 덮자, 반짝이던 마법이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내 어딘가로 들어와 빛나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고 스쳐 가 버렸다.
나는 잡고 싶었다. 이 마법을.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틀에 박힌 서평이 아니라, 나를 통과한 찰나의 순간을 잡기 위해. 딱 '그 문장'만 잡고 썼다.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2014) 썼다. 한없이 사소하고, 시시하고, 소소한 순간을 기록했다. 때론 몹시 부끄러울 만큼 엉망인 글도 일단은 써보기로 했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요약하고,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고, 그 전반에 흐르는 메시지를 찾는 게 아니라, 그저 한 문장. 내게 와닿은 한 문장에 감응해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책의 주제와 닿기도 했지만, 전혀 생뚱맞은 이야기를 썼다. 이 책이 통과해서 미세하게 변화한 나의 마음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쓰면 또 쓰다 말 것 같아, 누구나 볼 수 있는 블로그에 '문장과 생각'이라는 챕터를 만들고 썼다. 하루 몇 명 들어오지 않는 외딴곳이지만, ‘누구나’ 들어올 수 있으니까. 보는 이도, 독촉하는 이도, 마감도 없는 그곳에서 2018년 1월부터, 현재(2023년 10월)까지 나는 쓰고 있다. 그렇게 쌓인 글이 약 편 정도가 된다.
일이 바빠서, 날이 좋아서 이런저런 이유로 못 쓴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일이 바빠도, 날이 좋아도 썼다. 인생은 늘 질문 투성이인데, 책의 어떤 문장은 정말 마법처럼 짠하고 내게 답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만 가지고 썼다. 다 쓰기 전까지 어떤 문장에 반응해 어떤 ‘답’을 찾을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언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답’이 나왔다. 당연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니까. 나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서평'을 쓰는 게 아니라, 마음껏 오독하고 '나의 답'을 쓰는 거니까.
『마법의 서평 에세이, 어차피 오독』은 그 시간 동안 써 내려온 ‘오독의 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음껏 오독할 우리를 위해
글을 읽고, 고치고, 옮기며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만나, ‘미래의 당신’을 생각했다. 책 속에는 정말 ‘답’이 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다른 시공간에서 각자의 ‘답’을 찾아갈 것이다.
삶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쏟아낸다. 때론 막막하다. 지친다. 캄캄하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세상의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답을 찾는 것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인생에 정답은 없다. 결국은 나의 해석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의 답을 찾아 반드시 오독해야 한다. 잘못 읽는 ‘오독(誤讀)’이 아니라’ 내가 읽는 ‘오독(吾讀)’이다.
이 책은 나의 오독이 기록이다. 이 책을 펼친 ‘당신’이 이 글을 다시 마음껏 오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주길.
그렇게 우리의 오독이, 우리의 시간이 따로 또 같이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