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 낮잠을 잤어요. 꿈속에서 엄마가 제 머리맡에 있더라고요. 근데 절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거예요. "엄마 내 머리 좀 쓰다듬어 줘."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안 움직이더라고요. 머리맡이 서늘했는데.... 따뜻하게 한 번 쓰다듬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엄마는 그러질 않더라고요. 순간 얼마나 서럽던지. 잠시 후에 깨고 보니 꿈이었어요. 나이 마흔이 넘어, 아직도 이런 꿈을 꾸는구나 싶어 허탈하고,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어요. 사랑받지 못한 아이였다는 결핍은 어른의 일상에서 툭, 허공에서 헛발질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니까요.
압니다. 부끄럽네요. 사실 나이가 들어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울 때 늘 옆에서 나를 보듬어 주고 챙겨준 건 엄마였으니까요. 대학원에 다니는 딸을 위해 대구에서 용인까지 올라와 손주들을 챙겨준 것도 엄마였죠. ‘돈 벌어’ 하지 않고, ‘몸 챙겨’ 하는 것도 늘 엄마고, 주기적으로 택배로 음식을 보내주는 것도 엄마였어요.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서도 그런 엄마가 나옵니다. 딸은 어린 시절을 등지고 살아가요. 몹시 가난했고, 갖가지 폭력이 있었어요. 주인공, 루시 바턴은 그곳과 멀어지고 싶죠. 가족들 역시 대학에 가고, 성공한 딸은 다른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만나지고 않고, 교류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엄마가 있었어요. 루시가 아파서 입원한 병실이었죠. 왜 아픈지도 모르게 오랫동안 아팠던 루시는 그렇게 엄마와 5일을 함께 합니다. 그들은 서먹하지도 애틋하지도 않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루시는 그 작은 순간들이 벅차게 다가오죠. 그리고 과거의 시공간도 파편적으로 왔다 갑니다. 지금, 이 순간을 보며, 과거의 이야기들이 다시 써지기도 하죠.
루시가 보기에 엄마는 항상 깨어있어요. 잠을 자는지 안 자는지 모를 정도로 옆에 있죠. 어느 날 밤은 갑자기 검사할 일이 생겨 지하 검사실로 가게 됩니다. 아픈 딸이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자, 엄마는 물어물어 찾아가서 지하 검사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죠. 루시는 그 앞에서 엄마를 보고 어떻게 왔냐고 묻고, 엄마는 ‘입이 있으니까’라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평생 살아온 엄마에게 그것이 얼마나 큰 용기였는지, 루시는 압니다. 둘은 이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어져 있죠. 그런 감정들은 '사랑해'라는 말로 담을 수 없어요. 엄마가 루시의 요청에도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건 그래서가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은 읽고, 바로 다시 읽었어요. 저는 재독은 잘하지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다시 폈어요. 한 번 읽고 나니 무언가 아주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읽어도 여전히 명료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글은 우리의 기억처럼 파편적이고,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아요.
그래도 하나는 알 수 있어요. 모든 이야기는 재해석되고, 재편집되고, 반복된다는 것. 결국 '내가 하게 되는 이야기는 하나라는 것.'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도 여기서 단 하나의 이야기를 해요. 그 장면은 아주 직접적으로 나오는데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갑자기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화면 너머 시청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죠. 무심히 흘려보던 시청자들을 환기하죠. 이 소설에도 그런 페이지가 있어요. 소설 속 작가가 등장하는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이 인물의 입을 빌려, 직접적으로 말합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깊이 새겨들어요. 당신이 있는 이것, 당신이 쓰고 싶어 하는 이것." (...) "이건 아주 좋아요. 발표할 수 있을 거예요. 잘 들어요. 가난과 학대를 결합한 것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쫓아다닐 거예요. '학대'라니. 정말 바보 같은 단어 아닌가요. 상투적이고 바보 같은 단어예요. 사람들은 학대 없는 가난도 있다고 말할 거예요. 그래도 당신은 절대 아무 반응도 하지 말아요. 자기 글을 절대 방어하지 말아요.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 그건 당신도 알 거예요. 이건 자신이 전쟁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평생을 하루도 빠짐없이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예요. 이건 그의 곁을 지켰던 한 아내의 이야기예요. 그 세대에 속한 아내들은 대부분 그랬으니까요. 그녀가 딸의 병실에 찾아와 모두의 결혼이 좋지 않은 결말을 맺었다는 이야기들을 강박적으로 하는 거예요.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해요.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걸 그녀 자신도 몰라요. 이건 딸을 사랑하는 한 어머니의 이야기예요. 불완전한 사랑이긴 하지만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 말을 떠올려요. 지금 나는 잘못하고 있는 거야."(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문학동네, 2017) p124. 강조는 제가 했어요.)
이 단락은 독자 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절의 부모는 어쩔 수 없었다고 얼버무리지 않는 담담함. 지퍼를 닫지 않고 툭, 던진 가방처럼 온갖 자잘한 생활의 흔적들이 튀어나와도 감추지 않고, 흘러나온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서 가만히 놓아보겠다는 의지.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사랑을 찾는 작가의 따뜻함. 이 모든 감정이 저 안에 있다고 느껴졌어요. 따뜻하게 냉철한 마음이랄까요.
이런 마음은 조금씩 스며들다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완전히 공감각적으로 전해져요. 석양이 지는 어린 루시 바턴의 시공간에 저는 함께 머물죠. 마지막 문장-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p219)-은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이 이상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메리 올리버의 시구 그대로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기러기」 우리의 생은 감동적이니까요.
이번 부산 여행을 함께 한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추신)
이 글이 왜 편지 형태인지는 모르겠네요. 누구를 향하는지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처럼 저도 결국은 저를 향해 말한 것 같기도 하네요.
이 책은 저의 블로거 이웃분들 덕에 알게 되었어요. 그때는 제가 좋아하는 『올리브 키터리지』 작가인 것도, 이런 감정을 느낄 것도 몰랐어요. 각자의 시공간에서 따로 또 함께 석양을 보고 계실 이웃님들께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