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과 선함을 삶의 전략으로 선택한 것의 차이
‘착하다’와 ‘선하다’는 같은 의미일까?
국어사전에도 검색해보면 ‘선하다’란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데가 있다.’라는 정의가 나오기 때문에 비슷한 의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어가 쓰이는 맥락과 어감을 살펴보면, 의미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착하다’라는 단어는 칭찬이고 긍정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알게 모르게 낮춰부르는 뉘앙스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착하다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살펴보더라도 ‘멍청하지만 착하기는 해’, ‘착한 바보형’처럼 부정적인 단어와 쓰일 때가 많고, 무엇보다 나보다 높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착하다’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다.
공자와 같은 선인이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도 ‘착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회사 CEO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도 잘 사용되지 않는다.
보통 이러한 경우에는 착한 사람보다는 ‘선한 사람’이나 ‘덕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착한 사람’과 ‘선한 사람’은 무슨 차이일까?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실제로 쓰이는 상황을 고려하였을 때
내가 생각하는 차이는 ‘착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교육이나 사상 등을 주입 받아 남을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고,
‘선한 사람’은 나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전략과 수단으로 남을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제3자가 보았을 때는 모두 남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기 떄문에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타의에 의한 ‘착한 행동’인지,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선한 행동’인지에는 천지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어른들이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들을 통제하고 싶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지’이다.
(음모론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처럼 권력자들이 사회를 더 쉽게 통제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왜 착하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게 알려준 적 없이 무조건 착하게 행동하라는 교육과 사상을 주입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본인의 기분이 좋든 나쁘든 항상 남에게 다정하고 남을 배려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왜 남에게 잘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부모님이, 사회가 남을 위해 착한 행동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이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한때 나도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남을 위한 착한 행동은 바보같은 것일까?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남을 위한 행동은 나다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최고의 전략이기 때문에 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세상은 경쟁이며, 속임수로 가득하기 때문에 좋은 삶을 살기위해서는 항상 남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나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의 경우, 세상의 에너지는 작용 반작용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내가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내게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또한 살면서 최대한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남을 이용하거나 이기기 위해 행동할 때보다 진심을 담아 남을 기분 좋게 해주었을 때 내 기분도 훨씬 좋았던 경험들이 많다.
이처럼 나의 기분을 위해 남에게 잘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잘해주는 행동을 하였을 때 내 기분이 좋지 않은 상대에게는 잘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내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회사같은 곳에서 이러한 나의 원칙을 지키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 외에도 물리적인 세상은 결국 나의 의식이라는 안경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행복하고 선하게 바라봐야 행복하고 선한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진다고도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증명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에(어느정도의 물리학 법칙과 연결되는 과학적 근거는 있지만) 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의 영역이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동의하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한다.
로이스 로우리의 ‘the Giver’ 책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하 최상위 사람들은 각성한 giver들이었다고 말한 것이나, 니체가 자유정신을 찾기 위해 미덕은 목적이 아닌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 것 또한 ‘선하기 위해 사는 것’아 아닌 ‘선함’을 인생 전략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진화학적 관점에서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주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책의 주제도 이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삶의 가치관이 무엇이든, 이에 따라 어떠한 전략을 취하든
적어도 ‘남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해서 착하게 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인생 영화로 꼽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영화에 웨이몬드 캐릭터는 이러한 “타의에 의한 착함”과 “자의에 의한 선함”의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한없이 다정한 자신의 남편 웨이몬드를 보면서 주인공은 순진하고 착하지만 멍청하고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삶의 의미와 방향을 잃고 갈등하는 가운데 웨이몬드가 날린 대사를 듣고 눈물이 울컥 나기도 했다.
"The only thing I do know is that we have to be kind. Please. Be kind, especially when we don’t know what’s going on."
웨이몬드는 주인공이 생각했던 착한 멍청이가 아닌 혼란한 삶 속에서 다정함을 전략으로 선택한 지혜로운 사람이다.
웨이몬드가 사업가로 크게 성공하는 다중우주에서도 웨이몬드는 주인공에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순진한(Naïve)” 것이 아닌 “삶을 위해 전략적이며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해 방황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에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자신만의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방황 속에서 ‘선한 행동’은 최고의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남을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 착하게 살아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