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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와 '폭력관찰학습'

아무도 나를 숨쉬게 할 수 없어 — 영혜의 침묵과 내면의 치유

by 마음 자서전

“고기를 안 먹겠다고 말한다. 회사에서 부부동반 회식이 있을 때도 영혜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서 화제의 도마 위에 오른다. 고기를 안 먹어서 몸은 점점 여위어갔다. 남편은 불편해하고 친정에 알린다. 가족동반 모임에서 영혜의 아버지는 고기를 먹이려고 노력하고 심지어는 고기를 강제로 먹이기까지 하지만 영혜는 토하고 아버지는 따귀를 때린다. 영혜는 손목을 칼로 긋고 형부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실려 간다.”

영혜는 단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한 문장은 세상 전체를 거스르는 선언처럼 들렸다. 남편은 체면을 이유로, 아버지는 가부장의 권위로 그녀의 결심을 꺾으려 했다. 식탁 위의 고기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권력과 순응의 상징이 되었고, 영혜는 그 권력에 맞서는 몸으로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싸움은 너무 고독했다. 그녀는 이해받지 못했고, 도리어 “이상한 사람”, “미친 여자”로 낙인찍혔다. 가족과 사회는 그녀를 고치려 들었고, 결국 영혜는 세상의 폭력적 언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을 닫고 마음을 침묵시켰다.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이 말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관계 자체가 폭력으로 오염된 세상에서의 깊은 자각이었다.

폭력은 ‘보며’ 배운다.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사람이 직접 폭력을 당하지 않아도, 타인의 폭력적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폭력을 학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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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를 ‘폭력관찰학습(observational learning of violence)’이라 불렀다. 아이들은 폭력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운다.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통제하고, 폭력이 문제 해결의 수단이 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그 방식이 ‘관계의 언어’라고 착각하게 된다.

영혜의 가족은 바로 그 폭력의 학습장이었다. 아버지는 말보다 손이 먼저였고, 어머니는 침묵으로 폭력을 방조했다. 남편은 사회적 체면을 이유로 그녀의 선택을 통제했다.

그 속에서 영혜는 폭력은 피할 수 없는 규칙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그녀의 몸은 그 폭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국 영혜는 폭력을 모방하지 않았지만, 그 폭력을 자기 안에 내면화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은 타인을 때리는 대신, 자신을 찔렀다. 그것은 모방한 폭력이 아니라, 내면화된 폭력의 자기 파괴적 전이였다.

영혜가 고기를 거부한 것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그녀는 “피와 살”의 상징을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세계 전체를 거부했다. 그녀에게 채식은 생명의 존중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폭력을 먹고 살 수 없다”는 존재의 저항이었다.

이 선택은 파괴처럼 보이지만, 심리치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자기 회복의 몸짓이다.

영혜는 폭력의 언어로는 더 이상 자신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침묵을 택했다.

그 침묵 속에는 세상에 대한 단절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마지막 시도가 숨어 있다. 그녀는 외쳤다.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이 말은 결국 “이제는 내가 나를 숨 쉬게 해야 한다”는 조용한 결심이기도 하다.

폭력의 세계에서 자란 사람은 종종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하나는 폭력을 되풀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을 자기 안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영혜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녀의 고통은 세상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세상의 폭력에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비록 그 방식이 자기 파괴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나는 달라지고 싶다”는 무의식의 외침이 숨어 있다.


심리치유는 이 외침을 듣는 데서 시작된다. “도와달라”는 말 대신, “이해해달라”는 마음.

영혜가 바랐던 것도 구원이 아니라 이해였다. 누군가 그녀에게 “괜찮아,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해”라고 말했다면, 그녀는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치유는 타인의 손이 아니라, 이해받는 경험에서 일어난다. 폭력의 언어를 반복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순간, 그곳에 치유의 씨앗이 움튼다.

폭력의 관찰에서 이해의 관찰로 폭력은 보고 배운다. 그러나 이해와 공감도 역시 보고 배운다. 영혜는 폭력의 세계에서 침묵을 배웠지만, 그 침묵은 세상을 향한 거부가 아니라, 폭력 없는 언어를 찾아 나선 여정이었다.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본다’는 것은 그 폭력의 순환을 멈추는 첫걸음이다.


영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더 이상 폭력으로 숨 쉬고 싶지 않다. 이제는 고요 속에서 나를 숨 쉬게 하고 싶다.”

그녀의 선택이 비극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치유의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침묵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선이 폭력의 관찰이 아닌 이해의 관찰이 될 때, 비로소 영혜는, 그리고 우리 안의 또 다른 영혜는 조금씩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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