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닫힘, 하나의 인간 조건
나이가 들수록 산책이 깊어진다.
걸음은 느려지고, 대신 눈길은 더 멀리, 더 깊이 머문다.
어느날 어떤 동네 길을 걷다가, 문득 한 집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담장이 매우 높았다. 사람의 키 몇 배로 높아서, 그 안에서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는 엉뚱하게도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를 떠올렸다.
내가 살아오며 만난 이들 중에도 말보다 눈빛이 먼저 흔들리던 아이들이 있었고,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작은 소리 하나에도 몸을 움츠리던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닫힘은 선택이 아니었다. 세상이 너무 빠르고,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잠시라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문을 닫아둘 수밖에 없었던 것. 그 문은 바람을 피하는 작은 손짓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서는 조용한 사유가 흐르고, 느리지만 단단한 감정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닫힌 문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싶은 날이 있었고,
나이를 먹으니 그런 날이 오히려 더 잦아진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돌려 높은 담장을 바라보면 또 다른 유형의 닫힘이 떠오른다.
부를 쌓고 지위를 얻은 사람들,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쌓은 담.
젊었을 때는 그 담장을 부러워해 보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것이 얼마나 외로운 구조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세상과의 관계를 줄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고,
불편과 위험을 위해 쌓은 벽.
그 벽이 높아질수록
안도감은 커져도
정작 사람의 체온은 잊히기 마련이다.
나는 오래 살면서 알게 되었다.
자폐인의 닫힘은 살아내는 데 필요한 가림막이고,
부유층의 닫힘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고립의 구조라는 것을.
전자는 세상의 과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몸부림이고,
후자는 세상의 부족함—신뢰, 온기, 관계—을 잃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닫힌 문 앞에서 멈춰 선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떠올린다.
문을 닫는 이유는 다르지만,
문이 닫힌 채 오래 남아 있으면
그 안의 사람도, 그 밖의 사람도
서로의 온기를 잃어버리기 쉽다는 것.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니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남은 세월 동안 나는
담을 더 높이는 사람보다
담 너머의 바람과 햇빛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왔는가!” 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말 한마디가
사람을 세상으로 다시 불러내는 힘이 된다는 것을
나는 살아오며 여러 번 보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