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은 의도가 아니라
무지에서 시작된다

<그저 사고였을 뿐>

by 마음 자서전


한 편의 영화와 몇 문장의 철학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장면이 아니라 문장 하나다.

“그저 사고였을 뿐.”

이 문장은 너무 익숙해서, 우리는 그 안에 숨어 있는 윤리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바로 그 익숙함을 문제 삼는 영화다.


1. 보이지 않는 사고에서 시작되는 윤리

영화의 시작은 교통사고다. 그러나 카메라는 사고 내용물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개를 친 것인지, 사람을 친 것인지.

대신 보여주는 것은 사고 직후 주인공의 얼굴이다.

붉은빛과 어두운 빛이 교차하는 클로즈업, 영화에서 유일하게 클로즈업되는 신이다.


이 장면은 묻는다.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려 하는가를.

이때 주인공은 아직 악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사유를 멈출 준비가 된 사람이다.


2. 아이의 말, 그리고 어른들의 언어

자동차 안에 있던 아이는 말한다.

“아버지 책임이야.”

이 말은 단순하지만 정확하다. 아이의 세계에는 복잡한 변명이 없다.

반면 어른들은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 짧은 차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아이의 언어는 윤리의 출발점이고,

어른의 언어는 윤리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이 영화는 이후 내내, 아이의 이 한 문장이 어른들의 수많은 설명 속에서

어떻게 희미해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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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악은 극단에 있지 않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뚜렷한 악인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일본의 사상가 ‘야마구치 슈(山口 周)’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통 악은 선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이 둘은 모두 정규분포에서 최대치와 최소치에 해당하는 양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는 여기에 ‘평범’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평범하다는 것은 넘칠 정도로 많아서 시시하다는 의미이므로 정규분포의 개념을 적용하면 최빈치 혹은 중앙치를 뜻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악’의 위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의 인물들은 바로 이 중앙값의 인간들이다.

잔혹하지도, 특별히 사악하지도 않다. 그저 상황을 넘기고, 설명하고,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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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카드 결제라는 현대적 장면

경찰이 등장한다. 신랑 ‘알리’가 현찰이 없다고 하자, 카드단말기가 나온다.

경찰은 임의로 금액을 입력한다.


“이렇게 많이?”라는 말에 경찰은 말한다.

“작은 금액이다.”


이 장면에서 악은 폭력이 아니라 절차가 된다. 책임은 죄책감이 아니라 결제 완료로 바뀐다.

현실의 재현이라기보다, 감독은 악이 절차로 환원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알리’‘살라르’뿐이라는 점이다.

주인공도, 경찰도, 피해자도 이름이 없다.

이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름 없는 책임이 카드 한 장으로 정리된다.


5. 승용차에서 밴으로

영화의 초반, 주인공은 승용차를 운전한다. 가족이 함께 있고, 음악이 흐른다.

그러나 이후 자동차는 밴으로 바뀐다. 이 변화는 말한다.

이제 사람은 함께 가는 존재가 아니라, 운반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고.

가족의 세계는 사라지고, 처리의 세계가 시작된다.


6. 수미상관(首尾相關) ― 보지 않음에서 들림으로

영화는 죽은 자가 보이지 않음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절뚝이는 발자국 소리.

사고는 지나갔지만, 결과는 아직 걷고 있다.


7. 무지에서 시작되는 악

이 영화는 우리를 마지막 문장으로 이끈다.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말이다.


“어떠한 사람도 악을 일부러 행하지는 않으며, 악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지에 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 보여주는 악은 의도가 아니라 무지(無知),

폭력이 아니라 사유의 중단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묻지 않는다.


“너는 악한가?”


대신 이렇게 묻는다.


“너는 언제부터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는 말을 쉽게 하게 되었는가.”


이 영화는 한 번 보고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두 번 세 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화면은 내려가도, 질문은 오래 남는다.


칸 국제영화제 (Cannes Film Festival) 2025

� 황금종려상 (Palme d’Or) — 수상 (감독 자파르 파나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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