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데오 모딜리아니.
아침에 집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국회도서관. 책을 읽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운의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를 알게 된 것은 영화 <모딜리아니>를 보고 난 뒤였다. 그 전까지 그는 내 삶의 목록에 없는 이름이었다. 영화는 한 인간의 재능보다 먼저, 그의 상처를 보여주었다. 천재였으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 손은 재주로 가득했으나, 삶을 다루는 법은 배우지 못한 사람.
책 속의 그는 더욱 적나라했다. 술과 마약으로 몸을 돌보지 못했고, 폐병을 안고서도 술, 마약을 끊지 못했다. 네 명의 여인을 사랑했고, 그중 한 여인과는 아들까지 두었다. 사랑은 있었으나 머무는 법은 알지 못했던 사람 같았다.
특히 마음에 남은 인물은 1916년부터 1917년까지 그의 연인이었던 프렌치-캐나다 출신의 간호사, 시모네 티루이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훗날 성직자가 되었고, 끝내 자신의 생부가 모딜리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그 침묵 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연민과 거리 두기가 함께 들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모딜리아니는 물질에 의존했고, 정서적으로는 후원자와 연인에게 기대었으며, 인정받고 싶은 자기애(自己愛)에도 매달렸다. 그는 어쩌면 불안정한 애착 속에서 자라난 ‘철부지 어른’, 스스로를 달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무너진 가정, 감정을 함께 조절해 주던 어른의 부재. 그 빈자리를 술과 사랑으로 채우려 했다.
오늘 나는 한 화가의 그림보다, 한 인간의 삶을 읽었다. 성공하지 못한 생의 초상, 그러나 이해받아야 할 영혼의 기록을 만났다.
그래서 오늘의 감사는 이것이다.
늦게나마 그를 알게 해준 시간에 감사하다.
타인의 상처를 통해 내 삶의 균형을 돌아보게 해준 하루에 감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이란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끝내 다 살아내지 못한 삶의 고백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준 모딜리아니에게, 조용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