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감사일기

늙어간다는 것은
결론이 단단해진다는 것

오늘도 무사히, 노인의 일기

by 마음 자서전

2월 16일, 늙어간다는 것은 결론이 단단해진다는 것

아침에 눈을 뜨니, 집 안이 고요했다.

젊은 날에는 아침이 늘 전쟁 같았는데, 지금은 고요가 먼저 나를 맞는다. 책상에 앉아 책을 펼쳤다. 예전에는 집에서 책이 잘 읽히지 않아 도서관을 찾아다녔는데, 요즘은 다시 집에서도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나이가 들면 집중력이 약해진다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오히려 마음이 덜 흔들려서일까.


“이게 그런 뜻이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해 왔구나.”


책을 읽다 보면 내 속에서 오래전의 내가 고개를 든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이어지며 하나의 결론이 된다. 젊었을 때는 결론 없이 달리기만 했는데, 이제는 작은 결론 하나를 붙잡고 오래 바라볼 줄 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깊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영화 <넘버원>을 보았다. 원작 소설의 제목이 《당신이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앞으로 328번 남았습니다》라 한다.

‘328번.’

숫자로 남은 저녁이라니.


나는 이미 그 숫자를 다 써버린 사람이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가셨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오늘, 그 밥상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나이 들면 기억이 흐려진다는데, 어떤 기억은 더 또렷해진다. 노인이라 영화표를 할인받았지만, 마음속에서 치른 값은 꽤 컸다. 그래도 좋은 영화를 볼 수 있었으니 감사하다.


오늘도 7천 보 넘게 걸었다.

무릎이 가끔 삐걱거리지만, 아직은 나를 실어 나른다. 젊었을 때는 다리가 돈을 벌기 위해 움직였다면, 지금은 다리가 하루를 음미하기 위해 움직인다. 걸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젊은 날에는 몰랐다.

동생과 연휴 뒤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형제도 이제는 모두 늙었다. 언제까지 이런 약속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약속 하나가 더 귀하다.


오늘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직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아직 내 이름이 잊히지 않았다는 것. 젊은 날에는 돈을 벌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고, 쉴 틈이 없었다. 지금은 사람을 보고 산다. 사람의 얼굴, 사람의 목소리, 사람의 믿음.


나는 생각한다.

내가 모은 돈은 통장에 남겠지만, 내가 써버린 돈, 나누어준 시간, 함께 웃었던 기억은 사람의 마음에 남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 감사하다.

평범한 하루를 무사히 살 수 있었다는 것.

아무 근심 없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걸을 수 있었다는 것.


노인이 쓰는 감사일기는 거창하지 않다.

다만, 오늘 하루가 또 한 장 넘어갔음을 조용히 인정하는 기록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이 작은 결론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을 끝까지 지탱해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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