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얻기보다 나를 지키는 날

나와 오래 대화를 나눈 하루

by 마음 자서전

2월 17일, 화요일

일기를 쓴다는 것은 조용히 나를 불러내는 일이다.

오늘도 펜을 들며 나는 또 한 번 나를 만난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하지만, 문장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누군가와 오래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닮아가듯, 나 자신과의 대화 또한 나를 깊고 단단하게 만든다.


세상은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소란스럽다. 연예인의 표정 하나,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들끓는다. 그러나 정작 가장 소중한 ‘나’의 목소리에는 얼마나 귀 기울였던가.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나는 다시 묻는다. 세상을 얻는다 한들, 나를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 나는 나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또렷이 만난 하루였다.

점심에는 딸과 사위, 손자, 아내, 그리고 사돈과 함께 갈비집에서 식사를 했다. 고소한 고기 냄새가 식탁 위에 피어오르고, 웃음이 그 위를 둥실 떠다녔다. 서로의 잔에 물을 따라주며 건네는 사소한 말들 속에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온기가 스며 있었다. ‘유명한 집’이라서가 아니라, 함께였기에 감사한 자리였다.

식사 후 손자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아직은 내 손을 잡아주는 그 아이의 손이 따뜻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갈 손자. 작년보다 조금 더 올려준 세뱃돈에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흡족해졌다. 아이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순간, 나는 늙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나는 삶의 작은 경험을 들려주었고, 아이는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건네주었다. 세대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은 길 위를 걸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빛났다.

아침 두 시간, 오후 세 시간, 저녁 두 시간.

하루 일곱 시간을 책과 함께 보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또 다른 나를 만났다. 스타벅스의 잔잔한 음악 속에서도, 집 안의 고요 속에서도 문장은 나를 단단히 붙들어주었다.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배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백팩 두 개를 깨끗이 세탁했다. 작은 일 하나를 마치고 나니 마음도 정갈해졌다. 몸을 움직여 정리한 것은 가방이었지만, 실은 마음 한켠의 먼지도 함께 털어낸 듯하다.

오늘의 나는 손자를 생각하며 이런 바람을 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한 달에 한 번쯤 함께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용돈을 건네고 싶다고.

이 마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사랑일 것이다.

손주의 의견을 물어보아야겠다. 혹여 부담이 되지 않을지, 그 아이의 생각은 어떤지 조심스레 듣고 싶다. 사랑은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존중하는 일임을 나는 이제 안다.

오늘 하루, 나는 감사했고, 성실했고, 따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과 잘 대화했다.


내일은 읽고 있는 책을 끝내고, 또 새로운 책을 펼칠 것이다.

책장을 넘기듯, 나의 내일도 조용히 이어가리라.

오늘의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여전히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노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