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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자서전 Feb 10. 2017

<열한 계단>

나를 흔들어 깨운 불편한 지식 


이제껏 내가 원하는 책만 읽었다. 이책은 내가 읽기엔 불편한 책들을 알기 쉽게 풀어주었다. 독서를 할 때 읽기 쉬운 책을 읽으면 밥벌이는 된다. 하지만 발전이 되지 않는다. 밥벌이를 넘어서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읽기 불편한 책을 읽어야 한다. 저자가 말한 변증법의 원리도 불편함을 이기면 한 단계 발전한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발전이 안 된다.

이 책을 읽고 여러 종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 힌두교를 알 수 있었다. 철학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책은 각 장마다 일상적인 생활을 써나가는 에세이로 시작한다. 《죄와 벌》을 읽게 된 이야기를 풀어서 나간다. 왜 《죄와 벌》을 읽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저자는 수학을 못했다. 전체 290명에서 280등을 했다. 겨울방학 때 책을 한 권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에서 《죄와 벌》을 꺼냈다. 처음에는 등장인물이 많아 읽기가 어려웠다. 졸려웠다. 졸다 읽다를 반복하다가 책 한 권을 다 읽고 난 후엔 자신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소냐와의 만남을 통해 로쟈는 잘못되었는지를 깨닫는다. 세상을 구하는 방법에서 로쟈와 소냐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로쟈는 다수의 선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반면, 소냐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다수의 선을 실현했다.’ (38쪽) 


<죄와 벌>의 핵심문제를 다룬다. 로쟈는 다수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소냐는 자신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원하는 생각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다수를 구하는 방법은 종교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교회는 인간에게 강요한다. 순종과 인내와 복종을 말이다. 인간의 가치는 그렇게 하찮은가, 인간은 다만 종으로서, 노예로서 태어난 것일 뿐인가.


니체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서구의 문화를 병들게 했다고 진단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은 원한과 증오에서 출발한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둔다. (104쪽)


종교를 분석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세계관,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성을 기반으로 탄생과 성장 그리고 노화와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둘째, 베다와 불교의 세계관,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은 이후에 새로운 삶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셋째, 과학과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단절된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단절과 끝을 경험할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154-5


니체는 하나의 세계를 더 제시한다. 영원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는 반복의 세계 (중략)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런 극단적인 허두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155쪽)


기독교는 영원한 시간을, 불교는 반복되는 시간을, 과학은 단절된 시간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정적인 우주를, 불교는 변화하는 우주를, 니체는 영원회귀하는 우주를 제시한다.

체 게바라

이상적인 인간

나는 니체의 어린 아이를 떠올렸다.

“이상적인 인간이 있지. 그런 이는 보통 숨겨져 있어서, 극한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 타인의 시선 때문에 허세를 부리던 사람들마저도 지쳤을 때, 누가 진짜 이상적인 인간이었는지가 밝혀져, 그는 상황을 핑계 삼지 않고, 부조리에 불평하지 않으며, 자기 삶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지, 말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상적인 인간, 자기 삶의 입법자.”(215쪽)


저자는 이상적인 인간으로 체 게바라를 말한다. 이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체 게바라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가 죽어간 사람이다. 본인은 의사로서 영화롭게 일생동안 살 수 있었지만 모든 걸 벗어던지고 아프라카로, 남미로 소수의 혁명군을 이끌고 무모한 도전을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윤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의미를 깨달아 일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다. 노동과 헌신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주의 낙원을 이룩하고자 했던 것이다.’ (230쪽)


쿠바의 카스트로와 같이 혁명을 하였다. 카스트로와 같이 쿠바에서 영화롭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더 큰 꿈을 꾸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일어섰던 사람이다. 

마지막 장인 초월편에서는 

‘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고 즐기며 배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398쪽)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고 즐기면서 살아야 되는데, 현실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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