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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자서전 Sep 03. 2016

<채식주의자>

《한강, 채식주의자 깊게 읽기》(정미숙외, , 더스토리, 전자책)

     

1장 <욕망, 무너지지 쉬운 절대성>

자지. 정미숙 : <여성, 환멸을 넘어선 불멸의 기호>로 200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되며 평론가란 이름을 얻었다. 이후 소설 • 시 • 현대시조, 세 장르를 넘나들면서 공감, 생동하는 글쓰기를 지향하고 변화와 혁명을 모색 중이다. <현대여성소설연구입문>, <집요한 자유>, <페미니즘 비평>, <젠더와 권력 그리고 몸)등이 있다. 현재 부산외국어대학 교양대학 교수.

     

     

내용요약

아내의 육식종언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은 부당함과 불편함을 말한다. 잠도 설치고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지 않아서 영해는 소외된다.

     

전근대의 육식 문화에서는 다른 생물을 섭취하는 데 대해 속죄하는 일련의 의식행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양심의 힘을 덜고자 자신들이 잡아먹을 동물들에게 가능한 멀리 떨어져 동물들과의 친숙한 관계를 없애고, 생명체 살해에 따른 공포, 수치, 혐오, 후회의 감정을 떨쳐버렸다.

육식주의자 속에서 채식주의자는 불편한 존재다. 영해도 가족들에게 비난과 폭력을 당하지만

, 그녀의 결심은 확고했다.

     

꿈2에서 도축과 살인이 같은 의미로 겹쳐지고 있다. 살인자는 감춰지고 살인의 증거만 남아 유통되는 공간이다. 개고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오토바이에 개를 묶어 달린 개, 그 개고기는 소화되지만 명치에 남아있는 덩어리가 가슴을 억누른다. 이것은 간접적인 살인의 증거가 마음에 남았다는 것을 말한다.

영해의 가족은 자신의 내면을 억압하고 강제로 친목을 강요하는 집단이며, 외면적인 배려만 가능한 허구적인 유기체이다.

     

<몽고반점>에서 형부를 통해 이해받는다. 영해와 영해의 욕망을 동일시하는 형부는 영해의 목숨을 건 절박한 저항과 자신을 다 던지는 치열한 생의 자세를 내면화한다.

몽고반점은 순수와 원시의 흔적이다.

처제의 저항의지가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으며 작품 세계에 전환을 만든다. 형부가 영해에게 밀착할수록 몸의 감각을 되찾는다.

     

<나무불꽃>에서 언니는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지만, 영해를 정신병원에 가둔 것도 그녀이고,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도 사실상 그녀다. 그녀의 윤리적 판단은 동생과 남편을 용서할 수 없는

 영해는 서술자를 통해 단 한 번도 내면을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한 소외자로 가끔 의미심장한 말을 언니에게 건네지만 이러한 말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영해는 결국 자신의 감각의 원천인 몸을 축소하고 성을 지우고 나무로 변신하려 한다. 영해는 속죄를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언니의 옷에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영해의 모습은 우리의 욕망이 결국 ISR(Imaginary Symbolic-Real)*의 회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라캉의 상상계(the imaginary) 상징계(the symbolic) 실재계(the real)

     

     

     

2장

<타율화된 몸의 비극>(한정희)

한국교원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요약

먹는 행위는 에로스만큼이나 타나토스와 관련이 있고, 생명만큼이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단순히 생명체를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서 심리적이고 문화적인 측면과도 연관이 있다.

육식문화는 남성 중심의 지배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동물과 식물에 비유하기도 한다.

아내의 육식거부는 현대 사회의 상징계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실질계적 진실에 대한 발견이다. 이러한 실재계적 진실은 이성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으로, 상징계가 균열하는 지점에서 탈영토화된 감정•사고가 꿈으로 회귀한 것이다.

상징계에서 이탈하면서 남편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남편은 아내를 실재계에 묶어 두려하고 아내는 상상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몸은 사회화되었다. 권력을 통해서 강제되는 영상을 보이고 있다. 타율화된 몸은 개인의 주체성과 자기 정체성을 훼손하게 된다.

<몽고반점>에서 몸을 예술로 만들어가려고 하지만 상상계와 실재계에서 혼돈을 겪는다.

후기자본주의에선 몸에 대한 결정권과 주체성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

‘푸코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는 권력이 삶의 형식을 통해 은밀하게 욕망의 형태로 행사되며, 사람들은 강제나 강압을 통해서가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규율 권력에 자신을 예속시킨다.’( 33쪽)

     

     

3장 <트라우마의 (탈)역전이>

한귀은 :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이자 작가로 KBS진주 라디오에서 ‘책 테라피’코너를 진행했다. <엄마의 집짓기>, <그녀의 시간>, <가장 좋은 사랑은 아직 오지 않았다>, <모든 순간의 인문학>, <이별리뷰>, <이토록 영화 같은 당신>등이 있다.

     

     

요약

영해, 동물의 이중부정

영해의 트라우마는 아버지로부터 비록 되었으나 드러나지 않았다가 결혼 후 남편을 통해 드러난다.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구체적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아르토가 말한 숨결로서의 말,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탈통사적인 기호를 연상시키는데, 이 또한 로고스에서 떨어져가는 영해의 증상 중 하나이다.

영해는 먹는 것을 다른 생물에 대한 인간의 폭력으로 대치시켜 놓고 있다. 반면 드니 뒤클로는 이 시대를 자기 자신을 먹는 사회, 혹은 세기말의 거대한 편집증으로 보기도 한다.

     

인혜, 과각성과 강박증

인혜는 어려서 아버지에 대한 방어기재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요구된 것을 성취하고 절박하게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폭력은 안정된 상황을 원하는 심리를 갖게 된다. 남편 집안이 의사등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갖다.고 말한다.  

영해와 남편의 사건은 안정을 해친다고 보고 강박을 인지하는 계기가 된다.

     

인혜 남편

트라우마를 동반하는, 혹은 트라우마의 흔적으로서의 예술을 상상하게 한다. 바로 영혜와의 성광계이다. 바타유의 관점에서 볼 때 악행에 해당한다. 바타유의 약행이란 역설적인 것으로 낭비와 소모로서의 삶이다. 바타유가 찬양한 악의 주체는 자신의 정열로 삶을 불태우고 스스로를 예술에 희생한, 그들의 열정이 어떤 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거부한 사드, 포 또는 폴로베르 같은 예술가들이다. 그들에게는 무아경의 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소모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영혜와 인혜, 상징적 동일시와 징후적 관계

인혜에게 영혜는 상징적인 동일시의 대상이다. 상상적 동일시는 자신에게 이상화된 타자를 모방하고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은 어떤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상징적 동일시는 자신이 관찰당하는 위치와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 위치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영혜와 남편, 인혜와 남편

영혜의 남편은 영혜에 대해 외부인과 같은 시선을 취한다.

인혜와 남편의 관계는 희생을 매개로 한 역설적인 관계이다. 희생은 상대가 자신을 상대하도록 만들어주는 요소를 자신이 소유한 것처럼 행동하는 방식이며, 희생의 오류성은 상대가 원하고 상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요소를 자신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데 있다. 그러나 희생을 전제로 한 관계는 마르셀 모스가 말한 양도(讓渡)불가능한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

남편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주려했던 인혜가 성교장면을 보고는 남편에게 당신을 모르니까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용서를 매개로 그에게 또 다른 희생과 증여를 하여 거듭 발생할 수 있는 욕구를 차단했다.

     

트라우마의 서사화

동물적으로 먹는 것을 거부하는 영혜와 이런 동생을 강박증적으로 수용하려 하고 끊임없이 죄의식에 자신을 감금하는 인혜, 두 사람은 상반된 듯 보이지만 서로에게 상징적 동일시의 관계를 갖고 있다.

이 소설에서 유독 내적 초점화가 많이 쓰인 것도 화자의 담론과 인물의 담론을 모호하게 하여 화자의 담론이 인물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빌려주면서 그것을 떠맡고, 화자는 그대로 인물의 어조를 따르는 것이다.  

     

     

     

4장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주은경)

     

저자 : 주은경

조선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고등하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요약

전통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고 그것을 붕괴하는 데 몰두했다면 에코페미니즘은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같은 환경문제와 인류를 접목시켰다.

에코페미니즘의 발상은 남성의 여성 지배가 불합리하고 부당했듯이 여성적 원리로 돌아가는 것 역시 남성에게는 억압이 될 수 있다.

 

그 대안은 에코페미니스트인 발 플럼우드가 ‘자연의 의지력을 인정하는 '의지적 관점(intentional stance)'을 모든 억압의 근원이 되는 자연 지배의 전통을 깨트릴 방법으로 제시한다. 인간이 자연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없고, 자연과 차이점뿐 아니라 공통점도 가진 채 지구에서 공존하고 있으며, 인간은 물론이고 자연에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도 의지와 목적과 자주성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점이다.

한강은 이런 논의를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육식의 거부 채식, <채식주의자>

마리아 미즈, 캐럴린 머천트 등의 에코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면서부터 여성에 대한 학대가 더욱 심각해졌으며, 여성은 근대 사회의 주체가 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역설한다. 여성이 필연적으로 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플럼우드는 서구 철학의 이항 대립에서 언제나 우세한 쪽은 이성과 연결시켰고 열등한 쪽은 자연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이원론(二元論)을 식민지화의 논리라고 명명했다. 중심에 있는 이성적인 주체는 대조와 배제를 통해 타자를 주변화하고 지배자가 된다. 그녀는 플라톤 철학에서도 이와 같은 이성과 지배의 결합을 발견했다. 여기서 주인 주체master identity는 여성뿐만 아니라 노예(인증, 계급, 성차별의 복합체), 동물, 자연을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구성된다.

영혜의 육식거부는 가부장제를 유지시키는 물질적 기반의 자본주의로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본주의의 유지발전을 위해 여성의 역할을 축소하고 자연환경을 훼손해왔다.

영혜는 종속되었던 가부장제와 근대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결합을 통한 가치의 회복 <몽고반점>

영혜는 자연으로 회귀하기를 원했을 뿐, 육체적 결합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영혜의 욕망은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이며 남성의 식민화에 대한 거부이다.

근대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소비의 대상, 정복의 대상이었다. 이렇게 수동적일 수밖에 없던 여성이 자신의 욕구를 분출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 가부장적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억압에 저항하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계를 넘고자 하는 영혜의 소망은 그리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새로운 원리를 향한 희망의 몸짓 <나무불꽃>

나무를 향한 그녀의 시선은 식물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하게 되는 시발점이다. 그녀는 지배문화에 저항하려 하지만 세상은 더욱 그녀를 고립시킨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현대문명은 그녀의 남다른 행동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더 이상 현대문명에 존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연이 되어 여성 해방 자연 해방 그리고 인간 해방을 꿈꾼다.

     

     

5장

<《채식주의자》에 나타난 음식 모티프와 “소극적”저항>

     

저자 : 이귀우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미 소설을 전공했으며 프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에 대한 논물을 주로 썼다. <페미니즘의 어제와 오늘>, 옮긴 책 <경마장의 함정>, <피로 물든 방>

     

첫 번째 화자, 남편

평범한 속의 폭력성과 이질적 타자에 대한 혐오

남편은 순응주의자로서 자본주의 기업 문화에 철저하게 적응하는 인물이다. 과분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평범함을 귀하게 여겨주는 회사에서 월급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데 만족하고, 처형이 분양받은 아파트를 부러워하는 소시민이다. 영혜를 선택한 것도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화자, 형부- 나와 다른 자를 향한 동경과 매혹

형부는 권위체계에 안착해 있는 인물로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집안 출신에다가 헌신적인 부인을 만나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중산층의 예술가이다. 그는 예술가로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예술 작업을 도피처로 이용하여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위안을 찾으려 한다.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 순종적인 인혜와 결혼했고, 아내와 아들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현실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자궁과 같은 욕조에 웅크리고 앉아 잠들거나 캠코더로 찍는 이미지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세 번째 화자, 인혜 - 순응과 외면으로 살아남은 약자의 시건

인혜는 가부장제와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순종적인 맏딸로 자라나서, 안정과 신분 상승을 위해, ‘교육자와 의사가 대부분인 그의 집안 분위기가 좋아서 사랑한다는 확신이 없는데도 결혼했다. 그리고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살림을 늘려 평수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아들을 착실하게 길러내는 현모양처인 인혜는 영혜와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느낀 점

5명의 비평가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채식주의자>를 이야기하고 있다.

정미숙은 욕망이란 관점에서 작품을 비평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욕망이 있기에 역사는 발전한다. 그러나 남성위주의 욕망에 여성들의 욕망은 억눌려 왔다. 여성이 밭에서 채소를 가꾸었다면 남성은 사냥으로 고기를 잡았었다. 때문에 육식은 남성의 문화이다.

영혜가 육식종언을 말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기존 체계와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소설에 나오는 인물과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심리학에 대한 깊은 공부가 있어야 가능한 글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육식의 종말>에서 육식이 종말을 예언했다. 에코페미니즘적으로 본 평론가는 이제 남성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주도하는 환경 살리기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소설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서도 그 소설이 말하는 특징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물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읽고 동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소설을 읽을 때 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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