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집
<돼지들에게>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들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느니
외딴 섬, 한적한 해변에 세워진 우리 집,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방의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태어난 바다의 신비를 닮은,
날씨에 따라 빛과 색깔이 변하는 크고 작은 구슬이
천 개쯤 꿰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언제 어디서였는지 나는 잊었다.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두웠기에
나는 그가 돼지인지도 몰랐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주머니가 떨렸다는 것만 희미하게 알아챘을 뿐,
그날 이후 열 마라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내가 못 들은 척 외면하면
그들은 내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우리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럽게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 생긴 진주였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을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러 가지를 꺾었다.
어떤 놈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주인 없는 꽃밭에서 춤추고 노래했다.
그리고 힘센 돼지들이 앞장서서 부엌문을 부수고 들어와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내가 비축해놓은 빵을 뜯고 포도주를 비웠다.
달콤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파피는 계속되었다.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기 위해 나는 피를 흘리며 싸웠다.
때로 싸우고 때로 타협했다.
두 개를 달라면 하나만 주고,
속이 빈 가짜 진주목걸이로 그를 속였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
세계를 해석하는 입들은 지치지도 않네,
마이크 앞에서 짖어대는
늙고 노회한 여우와
그를 따르는 어리고 단순한 개들.
선(善)을 말하는 입은 악(惡)을 말하는 입보다 삐뜰어지기 쉬우니,
기름기 흐르는 입술로 아름다운 말들로
대중을 속이는 당신,
박수소리에 도취해, 자신의 위대함에 속아
스스로에게도 정직하지 못한 예언자.
겸손한 문체로 익명의 다수에게 다정한 편지를 띄우지만,
당신처럼 오만한 인간을 나는 알지 못하지,
당신보다 차가운 심장을 나는 보지 못했어.
계산된 ‘따듯’에 농락당했던 바보가 탄식한다.
늦었지만,
순진을 벗게 해줘서 고마워,
선생님.
<돼지의 본질>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돼지들에게》 (최영미, 실천문학사, 2005, 20180218)
고은시인에게 직격탄을 날린 최영미 시인의 작품을 읽고 싶어 찾았다.
예전에도 시인은 이런 유형의 시를 썼다.
세상에는 돼지가 많다. 많고 많은 돼지들이 세상을 더럽힌다. 그리고 모범적인 양인 양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