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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자서전 Mar 25. 2019

정신적 평등을 갈구함

   중학교 때 처음으로 교회엘 나갔다. 서울 신설동에서 살았다. 집 앞에 2층 상가가 있었다. 그 건물 2층은 교회였다. 내가 그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은 예수를 믿으려고 나간 게 아니었다.

  

  나는 덕수중학교를 다녔다. 동대문에 있었다. 동대문까지는 전차를 타고 다녔다. 언제나 전차는 만원이었다. 버스도 타 보았지만 전차에 비해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전차를 탔다. 하지만 전차가 늦게 오거나, 내가 늦게 나갔을 때는 버스를 타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귀갓길에는 대개 걸어서 집에 왔지만, 등굣길엔 차를 타고 갔다. 늦잠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에 내게도 사춘기가 왔다. 매일 만나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경기여중 빼지를 단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학생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야말로 나는 숙맥菽麥이었다. 그 여학생이 우리 집 앞에 있는 교회를 다닌다는 걸 알고부터 교회 앞에서 서성거렸다. 짝사랑으로 인해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대학을 다녔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 군대를 지원했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면서 교회는 잊고 살았다. 그러구러 결혼을 하고 나서 같은 동네에 사는 직장 상사와 함께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몸이 피곤하고 힘들어도,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기도에까지 참례했다. 헌금도 많이 했다. 당시 과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통장을 헌납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렇게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그 후, 서울에서 평택으로 이사를 온 지 30년이 되었다. 이사를 왔을 당시에 작은 시골교회를 나갔다. 옆집에 사는 집사님이랑 함께 갔다. 그 교회에 나간 첫날 예배 후에 회중에 있는 한 사람과 목사가 예배당에서 큰소리로 언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일단 언쟁만은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에 있는 사람은 장로님이라고 했다. 예배당에서 큰소리로 소리를 지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고, 아직 등록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일어났다.


   “조용히 하시고, 교인들을 모두 보낸 다음에 조용히 말씀을 나누시지요?”

내 말에 그만 언쟁을 하던 두 사람은 조용해졌다. 교인들도 예배당을 빠져나갔다.

  평택에서의 교회출석은 이렇게 시작됐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목사 은퇴 후에 드리려고 모아놓은 돈을 목사님이 미리 인출하였다는 것이었다. 장로는 ‘왜 말도 하지 않고 돈을 인출했느냐’는 것이었고, 목사는 ‘어차피 나에게 줄 돈을 사정이 있어서 꺼내 썼는데 이해해 달라’ 는 것이었다.

 나중에 장로의 편에 있던 교인들은 따로 교회를 세워서 나갔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지켰다.  

       

  은퇴 후에 서울에 사는 딸과 합가合家를 하였다. 딸집에서 5년을 있다가 재작년에 분가를 하여 평택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내가 있을 때 계셨던 목사님은 은퇴하셨고, 50대의 목사님이 오셨다.

  아무 말 없이 일 년 동안 교회를 다녔다. 설교를 들어보면 목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다. 젊은 목사님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고 설교를 하면 바닥이 보인다. 몇몇 사람으로 돌아가면서 하는 인사를 회전문 인사라고 한다. 젊은 목사가 짧은 지식을 가지고 돌려가면서 설교를 한다. 자신의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 신변잡담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양들의 선한 목자로서 교인들이 괴롭고 힘든 일이 있으면 어떻게 고통을 덜어줄까? 고민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목사에게 목회의 진정성을 찾기는 어렵다. 목회는 한 영혼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인들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도, 그 고통이 어떤 고통인지 느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직접경험을 할 수 없다면 책으로 간접경험을 한다면 그런 느낌을 알 수도 있다.

  교회 주보에 ‘명예장로 이름이 올라왔다. 나는 명예장로가 아니라 안수를 받은 장로인데, 사전 양해도 없이 주보에 ‘명예장로’라 이름을 올렸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명예장로로 올리겠다는 전화라도 했으면 이해를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에 사모님이 아내에게 명예장로로 올리겠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그래도 목사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양해를 구할 줄 알았다. (10개월이 지나 아내가 사모님에게 “사모님이 명예장로로 하겠다.”고 말하셨다고 이야기하니 그런 말을 한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내가 내게 전했다.) 사전 양해도 없이 명예장로로 둔감을 했다. 70이 넘은 장로에게 50대의 목사가 이래도 되는 건가하고 망연자실했다.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고 비어있는 집이 한 채가 있어서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해드렸다. 사모님과 목사님 아들이 머물기도 하고, 교회의 모임 장소로도 사용을 했다.  


  젊었을 때는 아내와 함께 주일학교 선생을 했었다. 40대부터 했으니 쾌 오래 되었다. 주일학교 선생은 나이가 들어서 하기 어렵겠지만, 어린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는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전도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주일예배가 끝나고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전도사도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왔다.

  “전도사님, 어린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쳐주고 싶은 데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요.”

  “장로님,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그런 걸 해 줄 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목사님에게 말씀을 드려야하지 않겠어요?”

  “아니요, 그런 건 말씀 안 드려도 됩니다.”

  “그럼,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상의해 보세요.”

글짓기 실력이 내놓으라고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글짓기를 좀 할 줄 아니까 내가 교회에 봉사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전도사와 이야기하고 난 후에 뒤돌아보니, 내가 전도사와 이야기하는 걸 목사님이 보고 계셨다.

  

  글짓기 교육에 대한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전도사에게 아무런 답변이 없다.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되도록 답변이 없다. 답답하여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봤더니, 전도사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들은 봐가 없다고 한다. 전도사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전도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막에 모래알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전도사에게 글짓기 교육을 하겠다고 한 다음 주에 목사의 설교 중에 ‘무슨 일을 하려면 신임을 받으라.’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교회에 대한, 목사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교회 어린이들에게 봉사하는 일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교회는 내가 다닐 교회가 아니다. 이런 교회는 다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다녔다. 조금의 변화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다.  

  

  아내가 목사님에게 남편이 서운한 점을 이야기했다. 목사는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자고 아내에게 날짜를 잡아서 알려달라고 전해왔다.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있어서  ‘왜 그런지?‘ 원인을 알아서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함으로써 문제를 덮으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과 단 둘이 점심을 하자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꺼냈다.  

  “왜 명예장로로 했습니까?”

  “누가 말해 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그랬습니다.”

나중에 원로목사에게 대화 내용을 말씀드리니,

  “모르면 나에게 물어봐야지,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고 역정을 내셨다.

 

  주일학교 글짓기를 막은 사실은 끝가지 부인을 한다. 목사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무너진다.  교회 권력을 자기의 마음대로 사용한다. 교회생활을 50년 가까이 해왔지만, 이런 경우는 보지 못했다. 내가 젊다면 모르겠다. 젊은 목사 비위를 맞춰 줄지도, 그러나 나이 먹어서 내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어렵다.

  나는 교회에 할 수 있는 이상으로 헌신 했다. 연말정산을 위해 기부금 영수증을 떼어보니, 작년 한 해 동안에 교회에 낸 헌금이 650만 원이다. 개인적으로 교회 각 단체에 준 돈을 빼고 그렇다. 돌봄노동자의 최저임금으로 일하는 나와 아내의 월급으로 10의 2조를 한 셈이다.   

  

  사회역학자로 유명한 영국 노팅엄 대학교의 리처드 G. 월킨슨 Richard G. Wilkinson 교수는 그가 쓴 책《평등해야 건강하다》에서 “불평등이 심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낮다.”고 말하며, “물질적 불평등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편안한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교회의 리더가 정신적 편안함을 줄 수 없을 때에 공동체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연말을 지나고 나서부터 교회에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3월부터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다.

  회피 방어기제이다. 상황을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목사를 보지 않으면 된다. 정든 교인들이 그립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이런 걸 이야기하면 목사를 험담하는 꼴이 된다. 이렇게 글을 써서 남겨 놓으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다. 내가 사용하는 회피방어기제를 성숙한 방어기제인 ‘억제’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렁거린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지만 그도 그럴 것 같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서울에 있는 교회로 나가고 싶다. 가까운 곳에 다닐 수 있는 교회가 있는지도 알아보아야겠다. 어쨌든 냉각기를 가져야하겠다. 그리고 난 뒤에 결정해도 좋으리라.

  많이 배우지는 못했다. 그런데 농촌지역에 사는 사람치고는 배우는 걸 좋아하고 배웠다는 말을 듣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배웠는지 배운 게 뭔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면 마음이 편할 수도 있는데, 알고 나니 떠돌이별이 된 것 같다.

  

  어차피 식자識者는 떠돌이별인 것을

  무궁한 우주의 떠돌이 별인 것을

  진실, 그 영원한 수수께끼

  별을 따려는 아이처럼

  방랑이 숙명인 것을


  왜 힘에 발 묻으려 하는가  

      -<지식인>중에서  박경리 시집 《우리들의 시간》


 소설가 박경리의 시를 읊조린다. 떠나게 되도 그게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정신적 평등을 간구한다.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할 평등을…. 그리고 떠돌고, 괴로워한다.

주님! 저를 가엾이 여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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