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을 좋아하나요

특별하게 기억되는 날들에 대하여

by 온시

아침 일찍 엄마 집에 가서 김장을 도왔다. 엄마 집을 나서니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분무기로 분사하듯 퍼지는 비였다. 보드랍고 촉촉한 겨울비를 맞는 것은 완전하게 좋은 일이었다. 옷이 젖는다고 무슨 대수겠는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이고, 원한다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 비 때문이었을까. 이미 향기를 잃었다고 생각한 은목서 향기가 거리에 다시 은은하게 진동했다.


나는 노래를 불렀다. “겨울비처럼 슬픈 노래를 이 순간 부를까……” 비 오는 날처럼 대중가요가 맞춤인 날이 있을까. 비 오는 날이면 언제나 음원 어플에 “비 오는 날 듣는 노래”를 검색해서 듣곤 한다. 비 오는 거리, 비가 오는 날엔, 비도 오고 그래서…. 얼마나 좋은 곡들이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늘 듣던 곡들이 아니었다.


“여보! 우리 오늘은 김종서 노래를 들으면서 드라이브하자! “


점점 더 이해가 가는 노래들이 있다. 내게는 김종서의 노래가 그중 하나였다. 그 노래가 발매되었던 당시에 나는 노래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김종서의 녹진한 감성은 어른의 것이었다. ‘지금은 알 수 없어’에 “my love”라는 가사가 되게 야한 거라고 친구들과 수군댔던 일들도 생각났다.


남편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럴싸해 보이는 카페를 찾아내고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물론 김종서의 노래를 들으며. 멍하니 창밖을 보는 내게 남편이 묻는다. ”뭘 보고 있어?“ ”빗방울이 어디에 맺히나 보고 있어.“ 대답 없이 남편이 손을 내민다. 내민 손을 잡는다. 차 안에서 손을 잡는 일은 남편은 너무나 좋아하는 스킨십이고 나는 너무나 귀찮아하는 스킨십이다.


우리가 도착한 카페는 넓게 조성된 대나무숲 한가운데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통창으로 보이는 카페 안이 작고 노란색인 조명들로 반짝이고 있었다. 비는 어느새 그쳤지만, 나 혼자였다면 무심하게 몸만 내려 카페로 걸어갔겠지만 언제나 앞일을 대비하는 남편은 꼼꼼하게 우산을 챙겼다. 비 오는 날은 라떼.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남편은 내가 극찬한 에세이스트 이화열의 새 책을 가지고 왔다. 나도 아직 읽기 전이었으므로 서문을 펴서 함께 읽었다. 기대가 되는 서문. 이화열의 책은 남편에게 양보하고,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을. 츠바이크의 글은 언제나 좋지만 어쩐 일인지 밑줄 그을 문장들을 찾지 못한다. 그의 문장들은 덩어리째 달려 온다.


창가에 앉은 두 중년남녀의 대화가 은근히 귀에 와 닿는다. 여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남자의 목소리뿐이다. 남자의 말은 질문으로 시작하지만, 대답을 듣기 전에 자신의 대답을 길게 늘여놓는 스타일이다. 몇 번이고 상대에게 묻고 스스로 대답하는 일이 반복된다. 여자는 지루해하고 있을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남편과 나는 말이 없다. 오늘만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언제나 거의 말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남편에게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끔 그게 너무 답답할 때가 있지만 저기의 남자처럼 말을 많이 한다면 그것도 끔찍한 일일 거라 생각한다.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남편이 챙긴 우산을 쓰고 조금 걸었다. 근처 대나무숲에서는 한때 드라마 촬영도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풍경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산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소리다. 토독토독 소리를 듣느라 우리는 또 말이 없다. “여보, 대나무숲이니까 비밀 하나 놓고 가.” “비밀?” “응, 여보는 비밀 없어?” “글쎄….”


돌아가는 길에는 다시 김종서의 ‘겨울비’를 들어야지. 오늘을 비 오는 날 중에서도 특별히 좋았던 날로 기억할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