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기다리나요

우리식의 낭만에 대하여

by 온시

“얘들아, 크리스마스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 믿어져?”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 무리 사이에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새로운 소식도 아닐 텐데 그 소식을 전하는 아이나, 그 소식을 듣는 아이들이나 순간 얼굴에 기대감이 차 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우리 집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부류의 사람들이다.


신혼 초 흥분과 설렘과 로맨스 덕분에 전혀 다른 인격으로 살 때나, 호아가 어렸을 때는 남들 따라 거실 한편에 크리스마스트리도 꾸며 보고, 산타 할아버지 깜짝 선물도 준비하느라 007 작전도 펼쳐 보고 했지만 다 추억 속의 일이 되어 버렸다. 셋의 취향이 이리 같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고요한 크리스마스를 보낸 지 너무 오래되었다.


크리스마스에는 큰 감흥이 없지만 연말의 분위기는 좋아한다. 세상은 아주 빨리 어두워지고, 어둠을 반짝이는 불빛들이 채운다. 찬 공기를 맞으며 밤거리를 걸으면 가게들은 하나 걸러 제각각의 예쁨으로 꾸민 트리들이 세워져 있다. 특히 마음에 드는 트리를 세운 가게 앞에서는 잠시 발길을 머물며 트리에 매달린 오너먼트들에도 하나하나 눈길을 준다. 아파트 단지를 도는 가벼운 밤산책이 유독 좋을 때도 이때다. 불이 꺼져 까맣거나 환히 밝혀 따뜻한 아파트 창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이 좋다.


좋았든 나빴든 한 해는 매듭을 지어 차곡차곡 넣어둘 수 있고, 새로운 한 해는 일단 무조건 기대가 된다. 좋은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날 것 같고, 뭐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 시기에는 온갖 소셜 미디어에서 올해의 아이템들을 소개하고, 내년을 함께 할 다이어리들을 소개한다.


오늘 남편이 친구들과 송년회가 있었으므로 나와 호아는 오랜만에 둘이 카페에 오래 앉아 있었다. 여지없이 재즈풍으로 편곡한 캐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 듣는 곡들이 많지만 익숙한 설렘이 느껴지는 곡들이다. 호아는 패드에 그림을 그린다. 나는 따뜻한 캐모마일 티를 마시며, 새로 산 다이어리에 새로운 계획들을 정리했다. 역시 가장 고심하게 되는 부분은 내년에 읽을 책을 계획하는 일이다. 올해의 아이템 중 내게 가장 흥미진진한 아이템은 역시 책이다. 다른 이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가 언제나 궁금한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전혀 판단하지 않고, 누군가가 말한 최고의 책에 호감을 갖는다. 어느새 중요해진 책들의 제목이 잊힐까 다급하게 메모한다. 그렇게 메모한 책들의 목록은 대책 없이 길어져 있다.


나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책들의 절반도 읽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치 내년은 다를 것이라는 듯 진지하게 정리한다. 이미 자주 다니는 도서관들의 희망도서 예산이 모두 소진되었고, 1월이 되면 다시 열릴 희망도서 신청 때 어떤 책을 먼저 신청해서 읽을 것인지 순서를 정해 본다. 어느 때보다 단정하고 깨끗한 글씨로 정리하는 다이어리 페이지를 나는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이 모든 일을 할 때 나는 내가 조금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크리스마스의 낭만은 모른다고 딱 잘라 말했던 문장을 조금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고요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것은 맞지만, 고요하다는 것이 낭만이 없다는 말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