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아 나의 기린
호아를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난다. 아직 미끄덩한 채였던 호아가 내 품에 안겨졌을 때 나는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감각을 처음 느꼈다. 내가 누워 있는 분만실의 침대를 둘러 예쁜 아기 기린이 또각또각 걸어 다니는 환영과 환청이 있었다.
호아는 울지 않았고, 놀랍게도 두 눈을 활짝 뜨고 있었다. 동공이 활짝 열린 까만 눈동자였지만 초점이 불명확했다. 눈앞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을 다 보겠다는 듯 요리조리 눈동자가 이동했다. “산모님, 아기에게 뽀뽀해도 돼요.”라는 말을 듣고 엉겁결에 호아의 볼에 입을 맞췄는데 너무 매끄러운 감각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한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단연코 이 장면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장면이 지나가버렸다는 게 두고두고 서운하다.
다른 의미로 호아가 우리에게 온 날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남편의 직장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남편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껏 부풀어 집에 돌아왔다. 나는 원래 익숙한 이의 조금 낯선 모습에 쉽게 반하곤 한다.
우리는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 한가운데서 온기를 나눴고 다 끝난 후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뭐야....” 남편의 따뜻한 숨결이 내 귀에 와 닿았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늘 결혼의 의미를 여자친구랑 밤새 놀았는데 내일 또 놀 수 있고, 영영 헤어지지 않는 거라고 정의했다. 연애 때에 남편은 데이트 후에 각자의 집에 돌아가는 일을 늘 어려워했다. 결혼하고 우리는 충실히 남편의 정의를 이행했다. 허락도, 거짓말도 없이 놀 수 있어서 좋았다. 연애의 연장선이었기 때문에 가족으로서의 다른 역할은 고려하지 않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일찍, 그리고 기대치 않게 다가왔다. 나는 며칠 후에 몸의 변화를 느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나른함이었다. 나는 어디든, 언제든 눕고 싶었고, 눈을 감고 싶었다. 온몸이 봄날의 나비처럼 팔랑대는 느낌이 들었다. 내 증상을 듣고도 무심하던 남편이 임신 테스트기를 사 왔고, 선명한 두 줄로 호아는 대답했다. 임신 테스트기를 건네받은 남편의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풀기 어려운 숙제를 만난 듯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편의 어리둥절하고 얼떨떨한 마음은 몇 분으로 끝이었다. 남편은 그 마음을 순식간에 회수해 저 깊숙이 집어 넣었다. 그 자리를 확신의 환희가 채웠다. 마치 호아가 우리 가족이 된 첫 순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기억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남편은 곧바로 연차를 냈고, 함께 산부인과에 갔고, 아직 아기집을 볼 수 없지만 임신이라는 결과를 들었고, 곧바로 양가 부모님 댁에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으며, 돌아오는 길에 임신기간에 함께 쓸 다이어리를 샀다. 남편의 환희는 어쩐지 어색하고 경직된 부분이 있었지만 나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진심이 있다면, 착한 의도라면 나는 언제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호아는, 내 작은 기린은 이내 내 품에서 거둬졌고, 하얀 강보에 싸여 분만실 밖으로 옮겨졌다. 나는 벌써 호아가 그리워졌다.
분만실 밖에 서 있던 남편은 그때 호아를 처음 만났다. 분명히 그때의 일을 이야기할 때 남편은 눈물이 났다고 말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울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를 않아 어떤 게 사실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