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
예전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봄이라고 대답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서는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감각을 사랑했다. 소위 “날이 풀린다”는 표현은 얼마나 정확한가. 꽁꽁 얼어 붙어 단단해지고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봄의 기운으로 스르르 풀릴 때의 흐붓함이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아이고야, 이제 살았다.’ 싶은 감각을 앞서는 것이었다.
어느 계절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언제나 선택지는 봄과 가을밖에 없었다. 여름과 겨울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는 꽤 까다로운 양보 절차가 필요했으므로. 그러다가 서른 넘어 문득 ‘어머, 나 여름 좋아하네.’ 싶어졌다. 여름이 좋은 이유를 헤아려보니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였다. 그중 단연코 첫 번째 이유는 먹거리. 포도, 복숭아, 옥수수, 고구마순 줄기, 맘대로 먹을 수 있는 찬 음료들까지. 아, 여름 좋다. 그 뒤로 몇 년을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다음은 가을이었다. 여름의 맹렬함이 끝났다는 것, 겨울로 가는 길목이라는 것 외에 특이점이 없던 가을이 예뻐 보인 것은 마흔을 넘어서였다. 가을의 색감은 다른 계절의 어떤 색감보다 부드럽고 우아했다. 내가 이래 봬도 가을웜톤이다. 가을을 좋아한 지 몇 년 안 되었던지라 올해 가을을 손꼽아 기다렸다. 가을에는 드라이브를 해야지,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아야지, 색색으로 물든 가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아야지. 과연 올해 가을은 아름다웠다. 느리게 보려고 마음먹으니 새록새록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차례차례 계절들에 항복하고 말았지만 겨울만큼은 좋아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올해 12월에 들어서니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여보, 12월 1일부터는 겨울이야.” “누가 그래?” “원래 그래. 12월 1월 2월은 겨울, 3월 4월 5월은 봄, 6월 7월 8월은 여름, 9월 10월 11월은 가을.” 난 부러 월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각각의 계절들을 떠올려 보았다.
12월은 겨울의 시작이었다. 겨울이라고 생각하니, 겨울이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니 볼에 와 닿는 차가운 바람이 좋았다. ‘겨울이라 그래.’라고 생각하니 성가실 일이 하나 없었다. 겨울의 매력은 따뜻함에 있다. 폭닥한 니트와 부드럽게 목을 감싸 주는 목폴라, 주머니 속 따뜻한 손난로와 길고 도톰한 양말, 몸을 꾹 눌러주는 솜이불은 생각만 해도 따뜻하다. 그리고 마시자마자 온몸에 골고루 온기를 퍼뜨리는 따뜻한 생강라떼. 겨울이 시작되자 나는 우유거품기를 꺼내고, 생강진액을 주문해 두고 생강라떼를 마실 생각에 설렌다.
비로소 나는 온 계절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쩜 이렇게 바람직한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하다. 이것은 아마도 나이가 주는 여유. 애써 붙잡지 않으면 저만치 달아나 버리는 시간들이 천천히 흐를 수 있게 하는 방법을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