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기억하기 위해

by 온시


올해는 술을 줄이기로 했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내가 술을 마신다는 것은 금요일에 돌아온 남편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이니 아주 안 할 수는 없고 한 주에 한 번이던 것을 격주로 한 번, 3주에 한 번으로 줄이자고 한 것이다.


오늘은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남편은 아주 배가 고픈 상태이고, 나는 아주 배가 부른 상태였다. 남편이 좋아하는 집밥 메뉴 나물볶음밥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나니 내가 곧이어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김밥 한 줄 사 먹고 말겠다며 몇 번을 사양했지만 남편이 오히려 밥 먹으러 나가자고 졸라댔다. 아마 그는 뭘 더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내면의 소리를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밑반찬을 깔아줄 때부터 사장님의 동선을 눈으로 애타게 훑을 정도로 술이 다급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사장님은 느긋하실까. 이윽고 술이 테이블 위에 놓이고, 남편이 나에게 딱 알맞게 주조한 소맥 한 잔을 마시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입술에 묻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혀끝으로 훑어 음미했다. 음, 이 맛이야.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거라 속도가 붙었다. 몇 잔 연거푸 마시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기분이 아니라 한순간에 솟아오르는 기분.



평소에 술을 마실 때 우리는 그다지 깊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그저 이게 맛있다는 둥, 저게 맛있다는 둥의 일차원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우리의 대화 패턴인데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대화라고 부를 만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남편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남편은 언제나 똑똑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에 대해 좋게 보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해보자면 얕잡아 보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많이 알아 지식이 많은 것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의 가장 큰 기준이 된다는 것이 나로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할 때 늘 여러 이유 가운데(물론 내가 “또?”라는 질문을 거듭해서 강제적으로 몇 개의 리스트를 받아낸 것이다.) 하나로 똑똑하다는 것을 꼽았으므로 나는 짐짓 똑똑한 사람인 척 그 말을 냉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남편이 말하는 똑똑함이 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남편은 상황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말수가 적고 자신의 일에 대해 중언부언 말을 엮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 남편이 그럼에도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비록 이것이 남편이 나를 다방면의 풍부한 지식과 재빠른 이해력을 가진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님이 밝혀졌지만, 남편이 말한 똑똑함에 가까운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어렴풋이 확신할 수 있었기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남편이 지닌 외로움이나 고단함을 내가 위로해 줄 수 있으리라. 어느 광고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앞에 앉은 남편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을 알게 된 게 햇수로 30년을 넘어가는데 어떤 시기의 남편을 떠올리면 전혀 다른 사람을 떠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존재가 내가 오래도록 알던 사람이 맞을까. 남편은 조금씩 변해가는데 나는 일상에 매몰되고, 다른 일들에 골몰하느라 남편의 변화에 무심했다가 어떤 순간 남편이라는 존재를 찬찬히 관찰하고 그 순간의 그의 모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다행히도 세월에 따라 변해가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 슬프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좀 오래 앉아 있다 싶었는데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호아에게 문자가 왔다. ‘엄마 어디야?’ 아빠랑 밖에서 밥을 먹었다고, 이제 들어갈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천천히 자리를 정리했다. 돌아오는 길은 밤바람이 쌀랑해서 남편에게 어깨에 팔을 둘러 달라고 부탁했다. 남편은 이내 내 어깨를 꽉 껴안았다. 로맨틱한 태도는 없다. 그저 나를 추위에서 보호하겠다는 듯 단단할 뿐이다.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이때의 남편을 기억하기 위해서. 또 언젠가 시간이 흘러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옆에 서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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