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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4.

by 만목

“운동은 다음에 가! 얼른 영화 보러 가야 해.”

지난 3월 말이었나? 아내 선이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응, 엄마. 메가박스로 바로 오시면 돼요. 꺅, 이병헌 배우 온대. 네, 거기서 봐요.”

아내가 장모님께 급하게 전화까지 했다. 장모님도 오신단다. 이미 예약이 거의 다 끝나서 떨어진 자리 3개 밖에 없었다. 춘이 실제로 이병헌 배우를 본 게 수십 년 전이었음을 떠올렸다. 아, 너무 아득한 세월이다. 당시에 ‘내일은 사랑’이라는 드라마 촬영을 서울시립대에서 했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안 하고 도서관만 다녔던 춘은 연기하는 배우들도 가끔 봤었다. 거기에 청년 이병헌이 있었다.

춘은 바둑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삼총사였던 춘과 친구 2명은 어렸을 때부터 잘 지냈는데 칼싸움을 하는 건 아니고 조용한 삼총사였다. 친구 둘은 만나면 바둑을 뒀다. 춘은 바둑을 어떻게 두는지 몰랐다. 그래서 구경만 했다. 이창호 열풍에 바둑계가 시끄러울 때쯤에야 친구가 빌려준 바둑책으로 춘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바둑책을 보며 공부했다.

그랬던 춘은 흔하지 않은 바둑 영화 ‘승부’를 보러 간다고 해서 정말 좋았다. 갔는데, 무대인사를 하기 위해 이병헌이 직접 극장으로 온다는 것이었다. 진짜 춘은 이병헌이 주연인지도 몰랐다. 이병헌과 몇몇 배우들이 초록등이 위에 붙어있는 비상구에서부터 등장하며 인사했다. 그리고 영화를 상영하기 전 춘의 바로 앞자리까지 이병헌 배우가 올라와서 옆쪽에 앉은 어떤 여자 관객과 사진을 찍었다. 예뻤다. 그리고 바로 앞 커플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역시 예뻤다. 춘은 바로 앞좌석의 이병헌의 뒤통수만 봤지만 아마 춘도 같이 사진에 찍혔을 것이다. 비록 배경이었겠지만. 혹시 이 글을 읽는 커플분이 어딘가에 사진을 올리지 않기를 춘은 기도했다. 인사를 마치고 다시 비상구로 나가는 이병헌을 아내 선이 따라가더니 이병헌을 불러 세웠다. 헐. 경호원이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다가왔다. 또 다른 승부였다! 그리고! 아내가 점수를 땄다. 맨 앞자리에 앉아계시다가 등장하신 장모님과 이병헌의 둘 사진을 아내가 촬영했다. 영화가 끝나고 만난 장모님께서 정말 좋아하셨다.


1992년 당시 조훈현이 바둑계 1등이었는데, 이창호가 그 뒤를 이어 바둑계 1등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세돌이 1등이었다. 춘이 어렸을 때는 일본이 1등이라서 바둑기사들이 일본에 가서 바둑을 배웠는데 말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신진서 선수가 1등이다. 그런데 …….

춘은 2015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다섯 번의 바둑을 놓치지 않고 다 봤다. 춘이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2014년까지 전 세계에 나왔던 모든 바둑 대국프로그램을 다 해봤던 춘이었다. 초반은 그럭저럭 두다가도 1선과 2선을 마무리해야 하는 부분에 이르면 바둑 대국프로그램은 오류투성이였다. 인간과 상대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알파고에게 이세돌이 졌다. 바둑이 진행되는 동안 두어지는 한 수 한 수에 상상하지 못했던 수들이 등장했다. 불안함이 몹시 강력하게 엄습했다. 그것들이 수가 된다는 걸 알게 된 해설자도 점점 말을 잊었다. 당시 그 상황을 TV로 보면서 울컥 목이 멘 춘은 눈물을 흘렸다. 거짓말이 아니다. 춘이 알고 있던 세상에 급변할 일이 일어난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이세돌 선수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네 번째 대국을 이세돌 선수가 이겼을 때 이게 인간이 이길 수 있는 마지막 대국이며 처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 AI 때문에 춘의 세상은 떠들썩하다. 바둑 TV에서도 AI가 승률과 집의 차이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럼 바둑이 끝났느냐? 아니다. 요즘은 AI와 함께 바둑을 공부한다. 춘도 글을 쓰고 있는 이 컴퓨터로 AI 바둑프로그램을 돌려서 바둑을 공부한다. 참고로 최선의 수라고 생각하는 곳에 AI가 파란 동그라미를 그려주는데 그곳을 블루스팟이라고 한다. 한 대국에서 이 블루스팟 자리에 프로 선수들이 두는 경우는 7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까지 신진서 선수의 블루스팟 착점률이 가장 높다.


바둑 AI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신경망 회로를 통해 계산한다. 대신 철학도 의지도 없다. 셀 수 없는 많은 자리를 계산으로 채울 뿐이다. 그런데 이길 수 있는 자리를 알려준다. 아낌없이 승부의 자리를 알려준다. 인간은 그걸 보고 학습한다. 이제껏 이창호도 공부해서 알고 있던 수학의 정석, 아니 바둑의 정석이 거의 다 틀렸음을 바둑 AI가 알려줬다. 그렇게 알게 된 지식과 깨달음을 통해 다시 다른 사람과의 승부에 도전하고 활용한다. 뭐지? 이렇게 되면 인공지능이 철학이나 마음은 없지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는 건가? 아, 뭔가 불편하다. 하지만 춘이 그러한 생각에 도달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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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바둑문제.JPG 영화 승부에 나오는 조훈현이 어린 이창호에게 낸 바둑 문제. 백 둘 차례. 202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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