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로스의 사제였던 내가, 현실에서도 힐러를?

by 오즈의고양이
김서진, Spirit Healer, 2016.jpg 김서진, Spirit Healer, 2016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운이 좋게도 나는, 취향 덕분에 먹고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게임의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블리자드에서 나온 <디아블로2>는 잠보다 중요했고, 밤샘은 일상이 되었다. 금요일 밤이면 복학생 선배들이 태워주는 버스를 타고 아이템을 수집하러 다니곤 했다. �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는 말처럼, 게임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대학원 진학도 고민했지만, 결국 게임 아카데미를 선택한 것이다. 1년 정도 배운 후 기획자로서 게임회사에 입사했고, 그렇게 6년 동안 게임개발자로 경력을 쌓았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된, 첫 번째 경험이었다.


<WOW>가 출시되었을 때는 게임에 미쳐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에서 다른 게임을 만들었지만, 집에 오면 아제로스로 날아가 모험을 즐겼다. 화면이 느린 것 같아 혼자 낑낑대며 램과 그래픽 카드까지 업그레이드해봤다. 식사 시간도 아까워서 늘 모니터 앞에서 대충 때우곤 했다. 50인 공격대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면서, 짬이 날 때면 게임 공략사이트를 보며 분석하고 외웠다. 남자친구가 데이트를 제안하면 나는 "오그리마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그리마는 호드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게임 속 수도다.) 그때 나의 삶의 중심은 단연코, 현실이 아닌 게임 속 세상이었다.


내가 선택한 캐릭터는 대부분이 기피하던 직업 ‘사제’였다. 워낙 소수였고 보기 힘들다고 해서 ‘귀족’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다른 직업군은 몬스터와 직접 대결할 수 있었지만, 사제는 약하고 공격 수단도 많지 않아 레벨업이 쉽지 않았다. "남 힐 해주는 게 뭐가 재밌냐"라는 말을 들으면, 내가 좀 이상한 사람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사제로 만렙을 찍고 다른 직업을 키울 때는 “레벨업이 이렇게 쉽다고?”하며 놀랐다. 하지만 사제가 아닌 다른 캐릭터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고 적응도 쉽지 않았다.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뚜렷하다. 앞에서 대신 맞아주는 '탱커'는 체력이 월등하지만 공격력이 약하다. 중간에 위치한 '딜러'들은 체력은 낮지만 공격력이 뛰어나다. 탱커가 몬스터의 주의를 끄는 동안 딜러들이 대부분의 피해를 입힌다. 나는 맨 뒤에서 체력이 부족한 파티원들을 회복시키는 역할이었다.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화려한 딜러를 선호했고, 실제로 딜러들이 게임 인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왜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사제가 나와는 잘 맞았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한발 떨어져 상황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고, 전방에서 공격하기보다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게 마음 편했다. 힐러는 청소와 비슷하다. 있을 땐 잘 모르지만, 없으면 바로 티가 나니까! 열심히 해도 티가 잘 나지 않는 이 일을, 나는 그때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했다. 게임과 현실의 시간이 반비례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그렇다면 현실은…? 그 간극이 조금씩 느껴지면서 자연스레 게임에서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로스의 평화를 지키려 애썼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앞으로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다. 물론 먹고 사는 데 돈은 중요하다. 하지만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늘 한발 뒤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무엇이 필요할까. 어떤 감정일까. 몸도 마음도,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움직이곤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현실에서도 여전히 사제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석적인 루트는 아니어도 누군가의 힘듦을 알아주고, 다독여주는 일.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게 응원하는 일을 찬찬히 준비해보려 한다. Never give up! �



나는 당신의 삶이 더 빛날 거라 믿어요.

당신 뒤에서 용기를 북돋을게요.

당신도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면,

우리 이제… 파티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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