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돌담과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주 작은 마을.
그 마을 안에 저희 외할머니댁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나무는 길쭉길쭉, 꽃들은 산들산들
길은 투박하지만 잘 다듬어져 있어서
동네가 참 정겨웠어요.
저희 엄마는 7남매 중 막내딸입니다.
외할머니는 애 셋을 낳은 저희 엄마를
갓난아기를 바라보듯 보는데,
그 애틋한 눈빛이 아직도 기억에 남네요.
TV도 없는 시골 동네라 뭘 해야 하나 심심해 했지만
씩씩한 동네 아이들 덕에 심심하지 않게 잘 놀았습니다.
잘 놀고, 실컷 먹고 밤이 되자
외할머니가 봉선화를 꺾어와 돌로 짓이겨 제 손톱에 올려 주셨고
나뭇잎으로 돌돌 말아 실로 꼭 묶어 주셨습니다.
(또 다른걸 넣으셨는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실을 너무 꽉 맸다며 투정도 부렸지만
외할머니는 그래야 색이 잘 물든다며 자상하면서도 투박한 말투로 저를 달랩니다.
입을 삐죽 내며 엄마에게 도움을 청하려 눈빛을 보냈지만
엄마도 외할머니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완성된 제 손가락을 보니 생각보다 너무 예뻐서 좋아라 했습니다.
아직도 그 곳의 풀냄새와 손톱 사이사이에 물들은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이제는 배도 부르고 손도 마음에 들고 실컷 뛰어놀았으니 슬슬 졸립니다.
찌르르 찌르르 귀뚜라미 소리, 풀벌레 소리 …
바람이 가져온 풀과 흙냄새 그리고 외할머니 온기가 가득한 집.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히 있어 가로등이 없어도 어둡지 않았고
덕분에 외할머니와 엄마가 마루에 앉아 함께 하늘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게 보였어요.
걱정도 섞였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도 있었습니다.
잠결에 바라본 그 뒷모습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네요.
그리고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외할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외할머니와 저 사이에는 그렇다 할 큰 추억거리도, 기억도 없지만
단 하나. 봉선화를 보면 외할머니가 생각이 나요.
최근에 큰 딸이 봉선화를 물들이고 싶다며 졸라 인터넷으로 구매했습니다.
이제는 옛날과는 다르게 간편하지만 자연 속 번거로움이 주는 추억거리는 없어졌네요.
그래도 저는 이 봉선화 물들이기가 어른과 아이 사이의 추억을 공유하는 하나의 끈 같아요.
추억을 되새기는 어른과 추억을 만드는 아이는 붉어진 손톱을 보며 함께 행복해 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