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아주아주 그리워진다

기꺼운 독서에세이

by 기꺼움
김초엽 「공생가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를 읽고 쓰다.




류드밀라는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재현하는 예술가다. 그가 그려내는 세계는 류드밀라 행성이라고 불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아득한 그리움을 느끼며 작품에 매혹된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품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뇌의 해석 연구소’에서는 사고 언어라 정의되는 뇌에서 만들어 내는 전기적 신호와 패턴을 분석한다.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독특한 사실이 발견되는데, 아기들의 뇌를 분석한 결과 ‘우리의 행성이 보고 싶어’와 같은 아기들이 사고할 수 없는 데이터가 감지된 것이다. 마치 서로 다른 여러 존재가 뇌 안에서 공존하는 듯한 생각의 패턴이다. 연구 결과 이들은 뇌에 공생하며 삶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토론하는 지성 생명체로 일곱 살까지 아이들의 뇌에 머무른다. 사람들은 일곱 살 이전을 기억할 수 없게 되고, 오로지 류드밀라만이 기억을 온전히 가진 채 지성 생명체들이 떠나온 아름다운 세계, 류드밀라 행성을 그려낸 것이다. 그렇다. 일곱 살 이전까지 뇌에서 함께 살던 지성 생명체로 인해 사람들은 류드밀라 행성에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고, 그림에도 매료된 것이다.




SF소설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다. 나는 일상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 안에서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마음이 안정이 된다. 그런 상태일 때 비로소 소설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김초엽 작가의 책을 여러 매체를 통해 추천을 받았을 때도 바로 읽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SF라는 장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일종의 확신이 있어서였다. 한 편 한 편 읽어가면서 어떤 편견들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스펙트럼그리고공생가설」까지 이르렀을 때 나는 더 이상 SF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아름다운 SF 소설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묘하게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에서 상상 속 이야기를 일상으로 데려온다.


흐트러진 퍼즐처럼 어린 시절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사진을 보고도 떠오르지 않는 장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 살 무렵 빨간 티셔츠에 멜빵바지를 입고 밥주걱을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속 어린 나, 그런 딸을 보며 필름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고 있을 20대 엄마의 표정과 말을 떠올리고 싶다는 생각이 스친다. 누구도 어린 시절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 사실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정말로 외계 지성 생명체와 공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하게 되는 것을 보면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에서 현실과 만나는 지점은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잔상을 남기는 게 분명하다.


소설 속 화자가 류드밀라의 행성을 그리워했듯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어린 시절, 어느 한낮이 어쩐지 아주 아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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