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라는 인사만으로 울고 싶어 졌다

기꺼운 독서에세이

by 기꺼움
김초엽 「스펙트럼」(『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를 읽고 쓰다.




빛의 파장에 따라 분해하여 배열한 ‘스펙트럼’, 이 단편에서는 색채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아련하면서도 마음을 흔드는 소재로 등장한다. 희진은 스카이랩의 촉망받는 연구원이었고, 외계 생명체 탐사를 위해 우주에 갔다가 추진체 결함으로 사라지게 된다. 실종된 지 40년 만에 지구로 돌아온 희진은 외계 지성 생명체와의 만남을 그녀의 손녀에게 들려준다.


낯선 행성에서 조난된 희진은 ‘이족 보행을 하는, 팔다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아니,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외계 지성 생명체였다. 희진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그녀를 해치려고 했지만, 그중 루이라는 존재가 공격을 막아주었고, 희진은 루이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된다. 볕이 잘 드는 루이의 동굴, 그곳에는 풍부한 색채가 담긴 그림들이 눈에 띈다. 외계 지적 생명체와 조우하게 되다니. 희진은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이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상징 언어를 사용하는 루이와 소통할 수 없음에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끼지만, 점차 그들에게도 비언어적인 표현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굴 안에서 죽어 있는 루이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자의식과 영혼이 이전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일정한 절차를 치르고 나면 새로운 루이가 나타난다. 첫 번째 루이와 닮았지만, 조금은 다른 두 번째 루이는 희진에게 다정하고, 호의적인 부분에서는 변함없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네 번째 루이. 이들이 변함없이 희진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은 동굴에 걸려 있던 그림 덕분이었다. 풍부한 색채의 그림은 그들이 기록하는 색채 언어였던 것이다. 이전 루이들은 그림을 통해 희진에 대한 정보를 남겼고, 그러한 기록 덕분에 루이들은 희진의 존재를 계속해서 보호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루이와 헤어지고 다섯 번째 루이와 만났을 때 그들의 무리는 습격을 당하게 되고, 희진은 도망치는 대열에 떠밀려 다른 협곡에 남겨지게 된다. 거기서 10년 만에 탈출 셔틀 신호를 수신하고, 그 후로도 20년을 우주에서 떠돌던 그녀는 지구로 구조신호를 보내면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다만, 그 시간의 간격에 대해서 희진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외계 지성 생명체와의 조우는 모두에게 밝히면서도 행성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끝내 함구했던 것처럼.




색채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생명체와의 만남, 지구를 벗어나 우주 어디쯤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야기를 읽는 일은 외계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의 위치를 끝내 밝히지 않았던 희진을 온전히 이해하는 경험이었다. 늦은 새벽 책상 위에서 나라는 존재는 지워지고, 가늠할 수 없는 우주 어딘가에서 외계 생명체와 마음을 나눈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책을 읽는 일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희진의 이야기 덕분에 생각은 우주로 뻗어나가고, 그 안에서 나의 삶과 교집합이 되는 부분을 포착했다. 루이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 울고 싶었다는 문장이 바로 그 지점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실감한 동시에 광활한 우주의 어느 별에서 고독과 싸워야 했던 희진이 안쓰러워 덩달아 울고 싶었다.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 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82쪽)




침대방에는 두 아이가 곤히 자고 있다. 저녁 10시 57분이면 울리는 알람에 이제 글을 쓰고 와도 된다고 말해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들. 책의 문장을 옮기면서 ‘잘 자’라는 인사를 조금 더 상냥하게 해 줄 걸, 후회했다. 지금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시간들이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좀 더 촘촘하게 만들어야지. 소중한 순간들을 알아채고, 내 생애 의미 있는 존재들을 안전하게 지켜내야지. 불시착한 행성에서 겪은 일들을 가만가만 들려준 ‘놀랍고, 아름다운 생물(96쪽)’ 희진 덕분에 곱씹을 수 있었던 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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