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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꺼움 Apr 04. 2020

[오늘, 책] 아무튼, 메모_정혜윤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책을 한 번 읽고 그 책에 대한 감상을 쓰는 일에 주춤거리게 된다. 책을 다시 읽으며 새롭게 보인 것들에서 감동받은 최근의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다. 몇 권의 책을 다시 읽으려고 책상 위에 쌓아놓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완벽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일의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가볍게 생각하자! 뭐 어때? 쓰고 다시 읽고, 또 고쳐 쓰면 되는 거지.




  아무튼 시리즈로 정혜윤 작가의 신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숨도 쉬지 않고(?) 책을 주문했다. '메모'라는 주제와 책의 디자인까지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짧은 단상이나 책 속의 문장들을 다이어리에 옮기는 일을 좋아한다. 예전 다이어리를 펼치면 그 시간 속의 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때의 나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구나 싶기도 하고, 간혹 당황스러운 생각의 조각을 발견하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 메모는 단순히 기록의 즐거움이었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정혜윤」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는 '메모주의자' 라는 주제로 메모를 통해 겪은 일화와, 메모에 관한 믿음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2부는 '나의 메모'라는 주제로 작가가 했던 메모를 통해 삶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책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작가 특유의 진지한 시선이 잘 담겨 있어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양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오래 머물고 싶어 지는 이야기들은 점점 늘어나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일순 멍하게 된다. 한 손에 들어오던 조그마한 눈덩이가 어느새 커다란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1부 메모주의자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메모하지 못하는 작가는 늦은 밤 혼자가 되고 나서야 낮에 들은 중요한 말들을 떠올리느라 고통을 느낀다. 잠자기 직전 혹은 잠이 막 들었을 때 메모장에 적어두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 깊은 밤을 뜬 눈으로 배회하는 작가는 이 시간을 영혼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밤의 피로가 싫은 게 아니라 너무 푹 잠만 자서 괴로울 때가 있었다"(28쪽)라는 문장에서 일주일 내내 잠은 푹 잤지만, 쓰고 읽는 시간이 부족해서 아쉬워하는 내 모습이 겹쳐졌다. 마음은 밤의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데, 몸은 밤의 시간으로 에너지를 빼앗기니 이것은 '일과 가정의 양립'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작가가 왜 메모주의자가 되었을까?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35쪽) 메모에 부여하는 의미가 깊고, 절실하다. 단순하게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나 생각을 적는 것을 넘어서 나를 이루고, 내일을 만드는 일이라니. 작가가 '메모'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라고 느껴졌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45쪽)


                                                                                                         


2부 나의 메모

                                                                                                                                                         

  읽는 내내 작가의 메모를, 그것을 통해 바뀐 시선을 따라갈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책과 삶, 사람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를 닮고 싶었다. 아직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작가가 읽은 책을 따라 읽고, 그가 쓴 글을 거듭 읽을 뿐이다. 정혜윤 작가가 친구의 기타에 써준 짧은 문구, "지금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112쪽) 라는 문장이 품은 비밀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상을 있다면 좋겠다. 이렇게 2부 '나의 메모'에는 마음을 울렁이게 만드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슬프고, 따뜻하고, 아프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싶은 이야기들.


  가령 이런 문장을 만나면 다이어리에 옮겨둘 수밖에 없다.(이것은 나의 내일을 위한 일이다.) "나는 이제는 안다.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것, 미래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란 것. 사는 것도 미래도 그냥 그런 것.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슬퍼했던가? 누군가의 삶이 사라졌다는 것에 대해서."(83쪽) 많은 문장에 밑줄을 긋고, 다이어리에 적고 난 뒤에 만난 마지막 이야기.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전범이었던 이학래의 손에 들려 있던 한 장의 메모지, 사형당한 조선인 스물세 명의 명단. "메모지에 적힌 그 이름들이 그에게 삶의 이유를 주었다."(159쪽) 책장을 덮는다. 이제 '메모'는 예전에 내가 알던 '메모'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결국 평생에 걸친 몇 개의 사랑으로 요약될 것이다. 어떤 곳이 밝고 찬란하다면 그 안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해 한 해 빛을 따라 더 멀리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164쪽)
- 정혜윤 『아무튼, 메모』(위고, 2020)



<글머리 사진>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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